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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영역을 막론하고 특정한 쪽의 극단보다는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균형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신앙의 균형은 특히 요즘의 내 삶 속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처음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주요 성경구절을 통해 구원의 교리를 알게 되었을 때의 희열은 놀라웠다. 말주변 없고 왜소하고 대인기피 증세도 있던 내가 매일 별 의미없이 보내던 10대 시절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흔히 말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라고 하는 시점 이후로 내 삶에 물리적인 변화는 별로 없었지만, 이상하게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 구절과 찬양의 가사부터 생각하고 혼자 즐거워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잘 모르면서 진지하게 생각했는데, 신앙 교리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매우 얕았지만 열정만큼은 넘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마치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기쁨이 생겨나는 듯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쁨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고 아기를 키우며 박사과정 졸업을 준비하는 지금 내 시점에서 10대와 20대 싱글일 때의 패기 있는(?) 신앙의 열정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생각해 보면 '사랑'의 특성일 수도 있다. 처음 사랑할 때의 기쁨은 정말 놀랍고 세상이 달라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누군가와 연애할 때와도 비슷하다. 그 사랑이 최고점에 이르러서 결혼을 하고 결실을 맺어서 가정을 이루고 아기를 키우기 시작하니, 여전히 똑같이 사랑하는 아내이고 사랑하는 자녀이지만 처음과는 다르다. 맨 처음 시작할 때처럼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랑이 샘솟고 그 감정이 지속되면 가장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의지'를 동반한 노력이 필요해지는 것 같다.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치여서 유지되지 않을 때, 나는 내가 저절로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처럼 사랑이 샘솟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고, 나는 왜 (잘 믿는다고 생각되는) 남들처럼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오해의 불길은 내 삶의 근본적인 소명, 즉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동기부여를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불길로 크게 번졌고, 지금의 대학원 생활에서 성취해야 하는 것(박사학위)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인 결핍은 10대 때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 때와 종류만 다를 뿐이지 현실적인 결핍은 똑같이 있다. 한창 신앙의 열정이 커져갈 때에도 내 성격과 외모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찔렀었다. 지금은 내 실력부족과 실력부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의지박약까지 싸잡아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못마땅하고 싫은 상태지만, 결국 결핍이 인생 내내 존재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하지만 부족함 속에서도 결혼 생활을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신경쓰는 것을 사실은 신앙에서도 똑같이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신앙에서만큼은 여전히 '저절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요즘은 그게 안 되는지를 너무 골똘히 생각하느라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의지를 다짐한다. 처음 사랑할 때의 기쁨에 힘입어서 초반에 저절로 삶이 살아지는 것 같겠지만, 알다시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크기의 자극에는 매우 빠르게 적응을 하며,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되지 않게 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바울이 위의 말씀을 비롯한 여러 편지를 통해서 항상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사실상 명령하다시피 가르친 것도, 신앙생활이 마냥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신앙의 기쁨은 내가 의지적으로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이지, 한 번 믿고 나면 저절로 발동되는 패시브 스킬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끝까지 격려해 주시고 도와 주시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시지는 않는 젠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 그에 맞게 호응해서 합을 이루기 위해 나의 의지와 노력, 호응도 필요하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물론 내 의지만으로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도 못하는 내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을 좀더 많이 배려(?)해 주시는 것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신앙의 기쁨이 솟아나고, 그 기쁨을 동력 삼아서 내 삶의 동기 부여도 무한정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쪽으로 균형을 더 맞춰서 전인적인 신앙생활을 통한 삶의 긍정적인 발전을 이끌어 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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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데이터를 뽑아야 해서 시뮬레이션 코드와 스크립트 파일들만 한동안 쳐다보고 살면, 어느 순간 자신감이 무지 많이 떨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거 다 이미 누군가 했던 것 아닐까?"

"이제서야 겨우 이 정도 결과가 나왔나? 한참 더 해야 되는 것 아닐까?"

대략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이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려면 논문을 읽어야 하는데,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기분이라면 참 좋겠지만 그런 종류의 읽기도 아니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울함이 극단에 치닫고 논문을 어떻게든 써야만 하는 궁지에 몰려서 다시 내 분야의 논문을 읽기 시작하면 점점 그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게 된다. 특히 잘 쓰여진 논문을 연속해서 여러 개를 읽고 나면 머릿속이 정돈되고 내 연구를 어떻게 구상할 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내 겉모습에서 아무런 달라진 점은 없다. ㅋㅋ)

그런데 잘 쓴 논문과 그렇지 않은 논문을 구분할 줄 알려면 일단 많이 읽어봐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는 듯.
유명한 학회/저널에 출판되었고, 많이 인용되었으며, 오래된 (기왕이면 해당 연구 분야의 초석을 놓은) 논문은, 마치 고전 문학을 읽는 기분이 들겠지만, 분명히 유용한 측면이 있다. 깨끗한 산 속에서 자란 인삼을 자연주의 방식으로 숙성해서 진하게 달여 낸 홍삼 진액 같은 느낌이 있다. 버릴 것이 전혀 없고 몸에 양분과 에너지를 공급하고 부작용이 없는 그런 느낌.


그나저나 빨리 저널 논문을 완성해야 하는데, 당장 글을 쓰는데 필요한 2018년도 논문부터 찾아서 읽고 정리를 시작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1995~2000년 언저리의 논문까지 다시 오고야 마는 나도 참 징하다. ㅜㅜ 내 연구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고 마치 모래 위에 쌓은 성 같은 허술한 기분은 여전히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쯤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는" 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단계가 되면 좋겠다. 결국 일관되고 꾸준한 노력으로 귀결된다.

그동안의 집중력 부족과 끈기 부족이 초래한 시간 낭비를 이번에는 꼭 메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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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내와 함께 운전하다가 접촉사고를 당했다. T자 교차로에서 우회전을 하기 위해 멈춰 있었는데, 뒤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는 차에 꽤 강하게 들이받혔다. 당연히 뒷차의 100% 과실로 간주해서 뒷차에서 보험 처리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보험사가 대부분 알아서 해 주기 때문에 일을 크게 벌리지 않고 원만히 해결하고 싶었지만, 최소한 내가 직접적으로 받은 피해는 잘 수습해야 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들을 따져 가며 진행하다 보니 결국 범퍼를 교체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른쪽 뒷바퀴 휀더에 도색도 해야 했고 (안 그러면 녹이 슬게 될 상황), 아내와 내가 이동을 자주 해야 돼서 차는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수리하는 기간 동안 렌터카도 사용했다.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렇게 상대방 측 보험사로부터 대물사고 처리부터 다 하고 대인사고에 대한 처리는 일단은 안 하고 있었는데...

사고 발생 후 채 2시간이 되지 않아서 목 뒷쪽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사고가 발생한 그 순간에는 뒤에서 충격을 받았을 때 잠깐 놀라고 그 뒤로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연구실에 와서 회의를 하면서 노트북과 프로젝터 화면을 번갈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때마다 계속 목이 아파 왔다.
원래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쳐다봐야 하는 전공의 특성상 가끔 뒷목 뻐근해지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평소에 뻐근하던 것과는 확실하게 다른 느낌과 더 센 강도로 목이 계속 아파 왔다.

원래 교통사고가 나면 그 순간에 괜찮은 것 같더라도 하루를 지나고 보면 몸 어딘가가 아픈 후유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사고 발생 다음날에 병원에 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사고가 난 뒤에 긴장이 풀리자마자 계속 목이 신경 쓰이도록 아파서, 가해자 측에 대인사고 접수도 추가로 요청한 뒤에 오후에 바로 정형외과에 갔다.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다행히 뼈나 디스크에서 눈에 보이는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사고를 계기로 알게 된 것은 내가 일자목이라는 것이었다.
일자목은 정상인의 역C자형 목보다 충격에 취약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사고 후에 목이 아파진 것으로 진단을 받았다.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물리치료를 받기로 했다. ㅜㅜ



내가 일자목이라니…

사실 일자목과 거북목은 현대인, 특히 사무직에서 쉽게 발생하는 질환이다.
책상에서 컴퓨터 화면을 볼 때에는 모니터를 일부러 눈높이만큼 높게 두고 보려고 노력하지만, 내 자리뿐만 아니라 카페나 세미나실 같은 곳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훨씬 낮은 곳을 오랫동안 쳐다보는 자세도 자주 취할 수밖에 없고, 스마트폰도 아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일자목이 되기에 너무 좋은 조건에 있기는 하다. 내가 특별하게 목 건강을 챙기고 자세를 주의해야 하는데, 사실 집중적으로 일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고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목을 앞으로 빼고 화면을 쳐다보게 된다.

하지만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꺼내 들고 명시적으로
"님 일자목임."
이라고 선언해 버리니, 이제 자세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자목이 더 심해지면 거북목이 되는데, 그러면 보기에 안 좋은 것을 떠나서 허리도 나빠지고 팔다리도 저리는 등 건강에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물리치료를 마치고 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내 책상에 놓여진 모니터를 조금 더 높였다. 원래 책상에 모니터 받침대가 있어서 모니터의 상단이 내 눈높이에 맞춰져 있기는 했지만, 이걸로는 내가 평소에 화면을 볼 때 자꾸 목을 앞으로 내밀고 아래쪽으로 쳐다보는 자세를 유발하게 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모니터 화면의 정 중앙이 눈높이와 맞도록 모니터 밑에 책을 괴서 더 높였다.

자리에 앉고 나서는 의식적으로 어깨를 펴고 목을 똑바로 세우고 턱을 집어넣는 바른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쉴 때마다 양손을 목 뒤로 보내서 양쪽 가운데 손가락으로 7개의 목뼈를 하나씩 지긋이 누르며 고개를 위로 젖히는 운동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일자목이나 거북목이 우울증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1, 2]. 충격… ㄷㄷ
바르지 못한 자세는 근육과 골격의 특정 부분이 스트레스를 받도록 만들고, 그렇게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면 뇌도 부정적인 영향을 불필요하게 많이 받아서, 스트레스로 인해 평소보다 더 우울감이 커지는 식의 인과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

보통 우울증을 '마음의 병'으로 치부하고 심리적인 요소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지만, 의외로 뇌를 지탱하고 있는 신체가 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면 결국 '뇌'라는 신체기관 역시 병에 걸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에서 위액이 과다 분비되면 위염, 위궤양 등의 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는 것처럼, 뇌가 스트레스 호르몬에 더 많이 자주 노출되면 뇌 그 자체에 문제가 생기면서 우울감이 증폭되는 것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역시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우울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어깨를 펴고 양손을 허리에 두고 당당하게 서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자신감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하는데 [3], 그만큼 나의 심리적인 상태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신체적인 요소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겠다.

이제 (능력은 쥐뿔도 없지만 ㅋㅋ)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며 당당하게 살면서 목과 정신 건강에 더 많이 신경써야 하겠다.



<참고자료>

[1] "일자목 증후군(거북목 증후군) 심하면 우울증이나 무력감으로 발전",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6536

[2] 우울증, 절망감, 자살충동과 자세, http://blog.koreadaily.com/view/myhome.html?fod_style=B&med_usrid=posturedoctor&cid=675839&fod_no=4

[3] 당신의 자신감을 당장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 5, https://www.huffingtonpost.kr/2014/10/19/story_n_60099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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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에 대한 실험 코드를 고쳐 가며 새로 데이터를 뽑고, 또 문제가 있거나 개선할 부분이 보이면 다시 고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유난히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어떤 설계(design)으로 개선해서 목적을 달성할 것인지 결정하는 단계이다.


예를 들어, 라우팅 프로토콜을 고치는 과정에서, source node가 자신이 트래픽을 보내기 위해서 먼저 경로를 탐색(route discovery)하고 선택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자주 하게 되면 그만큼 네트워크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러한 route discovery 자체를 줄이기 위해서 먼저 실제로 route discovery를 몇 번씩 했는지 파악을 할 필요가 생겼다. 이것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생각을 해 보았는데,

  1. 그냥 각 source node의 ID로 된 텍스트 파일을 만들고, 매 초마다 route discovery를 몇 번 했는지 숫자를 텍스트 파일에 시간 순서대로 한 줄씩 기록하는 방법
  2. Route discovery 전체를 기록하는 텍스트 파일 한 개를 만들고, 모든 source node가 같은 파일 포인터에 접근해서 시간, 노드ID, route discovery를 수행했다는 flag를 한 줄로 기록하는 방법

위의 두 가지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로 기록할 수 있어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통계를 내고 엑셀 파일 같은 곳에 가져다 쓸 것까지 생각을 해 봤을 때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은지 쉽게 판단이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이게 깔끔하게 마음 편한 방법으로 잘 정리가 되지 않자, 이것 때문에 하루 종일 다른 작업을 못하고 그냥 고민만 하고 딴짓만 하다가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사실은 내가 연구 측면에서 정의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고, 라우팅프로토콜의 성능을 측정하는 데 필요한 작은 통계 생성 방법일 뿐이고 어떤 설계를 따르던지 어차피 시뮬레이션 성능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무시하고 한 가지를 얼른 정해서 진행을 해도 되는 것이었는데, 어느 한 가지를 고르는 것이 속 시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연구 전체를 진행하지 못하고 마치 트랩에 걸리듯이 꼼짝하지 못했다.


결국 지금 밤이 되어서 그냥 첫 번째 방법으로 진행해서 얼른 경로 탐색에 대한 기록부터 만들어내고, 그렇게 각 source node별로 만들어진 기록을 합산하는 스크립트를 파이썬으로 빨리 만들어서 붙이기로 했다. 사실 이미 각 노드마다 flow 트래픽 사용량에 대한 통계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내고 똑같이 파이썬 코드로 후처리(post-processing)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코드를 재활용해서 가장 적은 시간을 들여서 통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지저분하게 파일 개수가 많아지는 것, ns-3 코드 상에서 파일 포인터가 많아지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기도 하고...)


나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 단점이므로, 그냥 가급적이면 조금 더 빨리 결정한 다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밀어붙인 뒤에 나중에 문제가 터지면 그것을 그 시점에서 재빨리 고쳐 나가서 목적부터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의 것으로 충분하다 (마태복음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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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구하는 무선 네트워크, 메쉬 네트워크, 오버레이 네트워크, Quality-of-Service (QoS), 라우팅(Routing), 엣지 컴퓨팅(Edge Computing) 등의 분야에서 내로라 하는 대단한 연구자들이 좋은 학회와 저널에 내는 논문들을 보면, 마치 명작 고전 문학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 대단한 연구자들(일반적으로 대부분이 교수들)의 이름이 들어간 모든 논문이 다 명작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엄청나게 다작(多作)을 하는 중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쓴 몇몇 논문들은 누가 봐도 내용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고, 이해하기 좋은 문장으로 쓰여져 있으면서도 내용에 깊이가 있다.


논문들 중에 간혹 맨 뒤에 저자의 약력(bio)이 한두 문단씩 첨부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 굳이 저자들의 약력을 일부러 읽지는 않지만, 오늘은 잘 쓰여진 좋은 저널의 저자들(그래봤자 두 명이다)의 약력을 그냥 훑어보았다.


첫번째 저자는 박사과정 학생인데 중국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상태였다 (출판 연도로 봤을 때 지금은 이미 박사가 되었을 것이다). 두번째 저자는 지도교수인데, 인도계 미국인으로 학부, 석사, 박사를 모두 미국에서 했고, 그 뒤에 미국의 여러 주립 대학교에서 방문 연구원(아마도 포닥 PostDoc.)으로 있었다. 포닥뿐만 아니라 1990년대~2000년대 초반 사이에 인텔, 파나소닉, HP, EMC 등의 회사에서도 일했었다. (지금은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회사의 위상이 워낙 강하지만, 1990년대~2000년대만 해도 인텔, HP 같은 회사들이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갖는 위상이 상당했다. 지금도 연구 쪽에서는 아직 활발하기도 하고...) 아마 그 뒤에 교수가 된 듯 한데, 교수가 되고 나서는 top level 저널 여러 개의 에디터와 S급 국제학회의 세션 장과 리뷰어 등을 맡고 있다.


사실 다른 대부분의 잘 쓰여진 논문들도 논문 끝에 적혀 있는 저자 약력을 보면, 대부분이 위와 비슷하다.

내가 지금 내 연구를 느릿느릿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좋은 논문을 써 내는 미국대학의 교수들은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열심히 자기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신기하고 부럽다. 단 1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만, 아니 그렇게 살아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 엄청난 분량의 성과를, 그것도 질적으로도 우수한 성과를 척척 달성해 내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마치 처음부터 연구와 관련된 능력을 타고난 인간들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잘 갖춰진 교육의 힘으로 전인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한 사람들 중에서 어느 정도 지능이 더해짐으로써 위와 같은 능력자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부각되는 영재성을 비롯해서 선천적인 요소도 분명히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러한 원석을 잘 키워내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우수한 연구자로 다듬어지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저렇게 십수 년 동안 지치지 않고, 매너리즘에도 빠지지 않고 일관되게 자신의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top level의 연구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이다. 사실 연구 그 자체를 수행하는 데에는 비상한 머리도 도움이 되지만, 기존 연구들을 찾아보고 정리하고 분석해서 거기서 약간의 개선을 만들어 내는 꾸준한 노력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여기에 공동 저자들의 분업이 잘 되면 금상첨화)

나는 가끔 내 연구가 정말 쳐다도 보기 싫을 때가 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흥미가 생겨서 열심히 이것저것 찾아보고 글로 정리도 하는 등 마치 감정의 변화에 따라 생산성도 같이 따라 움직이는 듯한 취약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가령 일주일의 시간을 투입해도 생산성이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다.


사실 속으로 잘 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그게 결과만 취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아닌가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좋은 논문의 뒤에 약력이 적힌 그런 멋진 연구자가 지금 당장 "되고는" 싶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쌓아 올려야 할 노력과 훈련은 싫어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내 천성이 게으르고 노력을 투입해야 할 때의 인내심이 부족한 것이다. 이러한 게으름을 극복하고 인내심을 유지하려면 뼈를 깎는 심정으로 훈련을 하거나, 나의 동기 부여가 게으름을 뛰어넘어야만 한다. 아마 둘 다 병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면 그걸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이리 찔러보고 저리 찔러보며 해결책을 찾아내는 노력을 하는 대신, 그 고민을 회피하고 잠깐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포털 사이트와 SNS를 헤매게 된다. 그래서 하루 종일, 때로는 며칠에 걸쳐서 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해결해야 되는 그 연구, 그 문제가 정말로 내가 성취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쉬지 않고 계속 파고들었을 것이다. 롤플레잉 게임을 하면서 아직 잡지 못하는 보스 몬스터를 꼭 내 손으로 잡아야겠다는 목표의식이 생기면 무서운 속도로 인내심을 갖고 레벨업을 할 수 있는데, 그런 목표를 상실하면 레벨업을 할 생각은 들지 않고 그저 내가 때려잡기 쉬운 잡몹(잡 몬스터)을 잡으며 채워지지 않는 아주 작은 양의 행복으로 공허한 마음을 계속 채우려고만 든다.


나의 목표의식은 무엇인가?

진짜 질 좋은 논문을 쓰는 우수한 연구자가 되고 싶은 것이 맞나?

솔직히 진짜 그런 사람보다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면서 주변에 존재하는 소소한 소비거리만을 소비하면 그저 좋다고 생각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맞는 것 같다.)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5일 만에 논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다 새로 뒤집어 엎어서 쓸 수도 있으면서, 몇 달, 아니 실제로 실험을 시작한 것으로 따지면 일 년이 다 되도록 논문을 써내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내가 동기 부여를 상실한 것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왜 욕심이 없는 것인가?

잘 되고 싶고, 인정받고 싶지 않은 것인가?

왜 스스로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인생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일까?

더 큰 목표와 더 큰 행복을 위해, 지금 당장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피해서 포털 사이트와 SNS에서 아주 작은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의 흐름을 끊자. 그리고 더 나은 나를 상상하며, 하나씩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기쁨을 습관으로 만들자.

나는 충분히 내가 맡은 연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 자신을 믿고, (+나에게 근본적인 지혜와 힘을 주시는 전능자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믿고) 지금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를 향해 breakthrough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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