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일기] 2019.08.14

Life 2019. 8. 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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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오늘은 새벽예배에 갈 수 있었지만, 아내가 많이 피곤해해서 가지 않았다. 내가 소윤이 바로 옆에 붙어서 같이 자고 있었는데, 내가 일어나서 자리를 비우면 옆에 사람이 없어서 허전함을 느끼는 소윤이가 결국 아내가 자고 있는 위치에 가서 안기고 아내의 숙면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윤이는 잘 때나 놀고 있을 때나 항상 아내 또는 나와 피부를 맞닿아서 붙어 있으려고 하는데, 그만큼 나와 아내를 믿고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요즘같이 더운 여름에 항상 붙어 있으려고 하니 가끔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기회가 넘칠 때에 많이 안아 주고 애정 표현을 많이 해 주려고 한다.


<오전>

어제보다 조금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하였다. 소윤이도 평소보다 일찍 어린이집에 등원하였다. 어제 목욕을 했기 때문에 머리만 얼른 감고 빨리 준비해서 집 밖을 나설 수 있었다. 덕분에 평소에는 항상 점심식사 이후에 왔었던 스타벅스에 아침부터 와서 여유롭게 주차를 하고 공부하기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요즘은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독서실과 다를 바 없는 스터디카페에도 자주 갔었지만, 지나치게 조용해서 노트북을 갖고 뭔가 하기 어려운 곳보다는 적당히 소란스러운 곳이 더 좋다. 그리고 나는 주변 소음이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하기 싫은 일을 스스로 지속하는 게 싫어서 딴짓을 하려는 경향이 가장 큰 문제), 스타벅스만큼 좋은 곳이 없다. 이렇게 된장남이 되어 간다. 그러나 나의 생산성을 높일 수만 있다면 평생 된장남이 되어도 상관 없다.

에스겔 21:18-32 를 묵상했다. 죄악과 불순종으로 점철된 원래 있던 이스라엘 왕이 칼의 심판에 넘어진 뒤에, "다스릴 권리가 있는 그 사람이 오면" 왕위를 그에게 넘겨 주겠다는 말씀이 있다. 새로 세워지는 왕은 역사적으로는 바빌로니아의 침공을 받은 뒤에 바빌로니아에서 직접 세운 왕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죄와 불순종에 있는 나 자신이 내 속에 있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앉으시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예수님을 주인 삼는 것이 글자처럼 쉬우면 좋겠지만, 평생 추구하고 지켜야 하는 싸움임을 조금씩 알아 간다. 오늘 예수님을 주인 삼기 위해 애쓰기로 다짐하였다.


<전산학 박사에 대하여>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면 취업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지만, 이것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상황에서 막상 살펴 보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곤 한다. 박사학위 소지자는 경력직과 비슷하게 채용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산업계에서의 실무 경력과 비교하면 실무 수행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연구실에서 프로젝트를 많이 수행했지만, 프로젝트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보적인 수준의 구현에 머무른다. 

결국 박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장 생산 가능한 제품 개발보다는 프로토타이핑을 통한 연구개발에 가까운데, 이것을 다시 말하면 연구 측면에서 남들도 인정하는 성과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좋은 학회나 좋은 저널에 나의 연구 주제로 출판한 논문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태로 회사나 연구소, 대학교에서 해당하는 연구 주제와 일치하는 채용 공고를 내서 내가 거기에 지원해야만 내가 채용될 확률이 가장 높다.

하지만, 인생의 수많은 결정 속에서 나는 가족을 먼저 선택했고, 프로젝트를 맡을 기회가 올 때마다 다양한 분야를 배우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학교 내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을 도와 주는 일에 집중하는 등의 선택을 통해 (누군가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어진 시간 동안 내 연구 주제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에 실패했다. 프로젝트는 참 많이 했지만, 연구가 아닌 산업계에서는 그 어느 회사도 실무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컴퓨터공학의 측면에서 내가 쓸 줄 아는 도구의 수는 많지만, 특정한 한 분야에서의 전문성(expertise)으로 나를 증명할 수 없었다. 다 제쳐두고 오로지 코딩 실력 하나만 놓고 보니, 정보올림피아드 대회를 경험해 본 학부 졸업생들에 비하면 나는 코딩을 못하는 인간이 되어서 그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것저것 다 만져보며 연구실 서버들에 문제가 터지면 항상 내가 나서서 (그게 재미있었나 보다) 해결하다 보니, 내 연구주제보다는 DevOps 측면에서 오히려 더 잘하는 것 같지만, 요즘은 DevOps 엔지니어는 없어지는 추세인데 누가 뽑으려고 하겠는가?

이력서 상에서 나는 학위 기간은 평균보다 길고, 연구 실적은 많은 것 같지만 어느 한 분야에 특출나지가 않고, 프로젝트 수행을 많이 한 것이 그나마 봐줄 만 하지만 그것도 분야가 여러 갈래이고, 요즘 거의 모두가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인공지능이나 머신러닝 쪽으로 경험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내가 채용 담당자라고 해도 다른 박사의 이력서와 비교하다 보면 내 이력서를 거를 지도 모르겠다. 이력서의 문맥 사이에 감춰져 있는 나의 구구절절 스토리를 누가 알아 주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자기연민이나 하며 계속 절망해 있으면 진짜로 나는 패배자가 될 뿐이다. 과거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울증이 심각해져서 기한이 임박한 일조차 미루면서, 자기 비하를 멈추지 못하면서 인생을 허비하던 내가 최근 들어서야 그 악순환에서 벗어났다. 다시 자기 비하의 늪으로 돌아갈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인공지능 관련 지식을 거의 컴퓨터와 연관된 거의 모든 회사에서 요구하기 때문에, 일상의 시간 중 일부를 떼어서 머신러닝 관련 지식과 도구 사용법을 습득하는 데 할당하면 되는 일이다. 박사까지 하고 보니,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동영상 강의를 듣고 기억해 뒀다가 똑같이 따라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강의들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것 하나를 정해서 그저 따라하면 된다. 코딩 실력도 알고리즘 분야별로 가르쳐 주는 동영상 강의와 문제 샘플과 풀이가 넘쳐나니, 그저 따라하며 이해를 하면 될 일이다. 온라인 문제 사이트에서 몇 개를 풀어 보니, 코딩 속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지는 것 같으므로, 그냥 이것저것 쓸데없이 많이 생각하지 말고 해 보면 (just do it) 된다. 

마지막으로 논문을 한 편 쓰고 있으니, 이것도 쓰기 싫더라도 참고 써보자는 생각을 갖고 그저 손을 움직여서 실험을 하고 글을 쓰면 된다. '왜 나는 제대로 논문을 써내지 못할까?', '벌써 졸업하고 나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난 논문 완성도 못하고 뭘 했나?'와 같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 때문에 오늘 해낼 수 있는 일도 내일로 미뤄지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오늘 논문 쓰는 것이 하기 싫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서 꾹 참고 조금만 고쳐 보자. 여기까지만 고치고 게임 한 판 해야지'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임을 경험한다.

어제 또는 그저께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오늘 주어지는 하루는 그냥 오늘일 뿐, 내가 개선되는 것에만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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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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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른 세 명과 아이 세 명이 한 차로 고속도로를 포함해서 1시간 이상 이동해야 하는 필요가 잠깐 생겼었다. 사용 가능한 차량으로 우리집에 있는 싼타페TM 7인승과 다른 가족이 갖고 있는 트라제XG가 있었는데, 아이 셋이 모두 만 4세 이하라서 유아용 카시트 3개를 설치해야 했다. 실내 공간은 당연히 트라제XG가 훨씬 넓었지만, 구형 차량이다 보니 모든 시트에 ISOFIX (아이소픽스) 인터페이스가 하나도 없어서, 카시트 3개를 모두 안전벨트로만 체결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에 싼타페TM은 3열 좌석을 펴서 7인승을 만들 수는 있지만 너무 좁을 뿐더러, ISOFIX를 사용할 수 있는 시트가 2열의 양 바깥쪽 두 개뿐이라서 나머지 하나의 시트는 여전히 안전벨트로 체결해야 했다. 그리고 2열 양쪽에 카시트를 하나씩 설치하게 되면 2열을 접을 수 없기 때문에 3열에 사람이 타고 내리려면 트렁크를 통해서 타고 내려야 하는(...) 대단히 불편해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일정상의 문제로 다행히;;; 이렇게 여섯 명이 이동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싼타페TM 7인승에 카시트 3개를 설치하고 운전자를 제외하고 어른 두 명이 타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카시트 3개를 안전하게 설치할 수 있는 것일까?


위의 궁금증이 일어나던 시점에서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ISOFIX가 없는 위치에 카시트를 설치하면 안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점이다. 확인해 보니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카시트가 애초에 ISOFIX 방식만 지원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방법이 없지만, ISOFIX가 표준화되기 전에 만들어진 카시트나 일반 안전벨트 고정 방식을 동시에 지원하는 카시트라면 안전벨트(3점식)를 매는 모든 자리에 설치할 수 있다.


ISOFIX (아이소픽스)에 대해서 조금더 알아보니, 의자 등받이 아래쪽에 280mm 간격으로 있는 두 개의 고리와 등받이 위쪽으로 벨트를 넘겨서 고정시키는 탑 테더(top tether) 고리로 구성되어 있다. 카시트 뒷부분 아래쪽에 ISOFIX 고리를 잡기 위한 두 개의 팔처럼 나와 있는 부분을 시트에 맞춰서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밀어 주면 고정이 된다. 이렇게만 해도 기본적인 고정은 되지만, 머리 뒤로 넘기는 탑 테더도 같이 써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단 싼타페TM의 2열을 살펴 보니, 양쪽 가장자리에는 ISOFIX 인터페이스 (하단부 고리와 탑테더 고리 모두)가 각각 있었는데, 중간에는 없었다. 다만 미국에 수출하는 해외형 산타페TM의 경우, 2열의 중간 좌석 등받이 뒷부분에 탑테더 고리가 하나 더 있다. (하단부 고리는 여전히 없음) 그리고 3열 시트에는 ISOFIX 기능이 전혀 없다.


그러면 카시트 3개는 장착할 수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ISOFIX 지원하는 시트 2개 외에 남는 하나는, 크기만 허락한다면 2열의 가운데에 안전벨트로 설치할 수도 있고, 3열의 두 좌석 중 아무 곳에 안전벨트로 고정시켜서 설치해도 문제가 없다. (대신 자동차 매뉴얼과 카시트 매뉴얼을 꼼꼼히 읽고서 올바르게)


ISOFIX가 나온 배경을 살펴 보면, 차량의 안전벨트를 사용하여 카시트를 설치할 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연구 결과 70% 넘는 비율) 올바르게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시트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차량의 안전벨트를 두를 때, 그냥 일반 성인이 앉듯이 걸어 놓기만 해서는 안 되고, 안전벨트를 가장 끝까지 잡아당겨서 스르르 풀려나지 않고 탄탄하게 장력을 유지하는 모드가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 그 상태로 다시 안전벨트를 놓으면 되감기면서 카시트를 단단하게 잡아 준다. 이렇게 설치하지 않는 경우 사고 상황에서 카시트가 안전벨트에서 빠져나오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안전벨트로 체결하는 것보다 쉽고 정확하게 카시트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ISO에서 카시트를 체결하는 방식을 표준화시킨 것이 ISOFIX이다. 이 표준에 따라서 신차에 ISOFIX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 의무화된 시점이 미국 2002년, 유럽 2007년, 우리나라 2010년부터이다. 즉, 차량에 ISOFIX 인터페이스를 의무화시키기 전에 생산된 차량에는 ISOFIX가 없지만, 매뉴얼대로 올바르게 차량의 안전벨트를 사용해서 카시트를 설치하기만 하면 안전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ISOFIX와 안전벨트 체결 방식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안전하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사실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전벨트의 성능을 생각해 보면 안전벨트 방식이 비록 '잘못 설치할 가능성'이 높을지언정 안전성 그 자체는 ISOFIX에 비해서 나쁘다고 볼 수 없다.

안전벨트는 사고로 충격이 발생할 때 성인이 시트에서 튕겨나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최소한의 힘을 가져야 하는데, 거꾸로 생각해 보면 다양한 체형과 체중의 어른 사람이 의자에서 튕겨나가지 않게 잡아줄 만한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일반적인 성인을 흔히 75kg으로 가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사고로 인한 가속도가 작용해서 순간적으로 수백 kg의 하중이 실리는 경우에도 안전벨트가 부서지거나 끊어져서는 안 된다.

ISOFIX는 차체의 고장력 강판 부분에 금속의 고리가 붙어 있는 형태이다. 이 고리에 카시트의 ISOFIX 인터페이스가 맞물리게 되고, 맞물려 있는 동안에는 사고의 충격에도 빠지지 않아야 한다. 카시트의 무게는 10~20 kg 정도가 될 것이고, 카시트에 탑승하는 아기는 유치원생 정도로 자랄 때까지 약 25kg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합쳐서 50kg 이내의 무게가 되고, 사고 시 가속도 등에 의해서 그보다 더 강한 하중이 실리더라도 잡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36kg 정도로 보는 것 같다.)카시트와 아기의 무게를 합산해도 일반화시킨 성인의 무게보다 가볍고, 안전벨트는 훨씬 더 무거운 성인도 벗어나지 않도록 잡아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전벨트와 ISOFIX 모두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기본적인 안전성은 똑같다고 봐야 한다.


물론 ISOFIX가 안전벨트 방식에 비해 유리한 점은 카시트의 윗부분도 탑 테더를 사용해서 튼튼하게 잡아 주기 때문에 사고가 났을 때 안전벨트 방식에 비해 카시트의 윗 부분, 즉 영/유아의 머리 부분이 덜 흔들리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을 제외한다면 ISOFIX는 안전벨트보다 월등하게 안전하기 때문에 쓴다기보다는 설치 자체의 편의성 때문에 쓰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가끔 보면 ISOFIX가 아예 없는 차량이나, ISOFIX 기능은 있지만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특정 시트에 사제로 ISOFIX 기능을 만들어서 (ISOFIX 브라켓이라고 불린다) 카시트를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아주 위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ISOFIX 고리는 차체의 튼튼한 부분에 붙어 있고, 이것은 차량의 제조사가 버텨야 하는 힘과 강도 등의 기준에 맞춰서 제작한 것이다. 하지만, 시트 사이의 틈으로 철판으로 된 ISOFIX 브라켓을 넣고, 그 철판으로 카시트와 고정이 되도록 하는 사제 제품이 있다. 사제 브라켓의 철판도 얼핏 보면 튼튼해 보이지만 충돌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의 힘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시트의 뒤에서 버티고 있지만 충격에 의해 시트에 닿는 부분이 파손되거나 하는 경우에 어떻게 될 지 전혀 알 수 없다.


이왕이면 차량에 앉을 수 있는 모든 좌석에 다 ISOFIX 인터페이스가 달려 있으면 좋겠지만, 원가절감과 이윤 극대화를 항상 고민하는 차량 제조사의 입장에서 ISOFIX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기 위해 고장력 강판과 단단한 금속 고리를 더 많이 쓰는 것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미국, 유럽, 우리나라 모두 법으로 신차에 ISOFIX 기능이 의무적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지만, 정확하게 몇 개가 장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은 있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내수용 싼타페TM에 ISOFIX로 설치 가능한 자리는 2열의 양쪽 바깥의 두 자리이고, 3열에 카시트를 설치할 경우, 안전벨트로 체결해야 한다는 것.



<세 줄 요약>

1. 차량에 카시트를 놓으려는 자리에 ISOFIX가 사용 가능하다면 사용하는 것이 낫다.

2. ISOFIX가 아니더라도 차량의 안전벨트를 사용하면서 매뉴얼대로 제대로만 설치한다면, 기본적인 안전성에는 차이가 없다.

3. 차량에 순정 상태로 ISOFIX가 없는 시트에 사제로 ISOFIX 브라켓을 달거나 개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차라리 안전벨트를 사용하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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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분야에 관계 없지만 굳이 한정짓는다면 전공 분야에서) 더 잘하기를 원했고, 더 잘하게 되는 만큼 내가 자력으로 맡은 일들을 더 잘 (많은 경우에서 더 빠르게) 진전시키는 것을 항상 바라고 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의 역량과 관계 없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 소위 말해서 '하드캐리'로 진전되는 경험들이 하나둘씩 누적되다 보니 (물론 드러나지 않았을 뿐 실패도 같은 비중으로 누적), 바보같지만 더 잘하려고 애쓰는 시간의 일부를 떼어 내서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요행을 바라기 싫어했지만, 정작 그것이 무시무시한 완벽주의로 돌아와서 더더욱 나를 짓눌러서 현재의 나를 지속적으로 망가뜨리는 광경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게 맡겨진 일들은 과거부터 줄곧 그래 왔듯이 지금도 여전히 도전적이다. 내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달려드는 도전적인 상황에서, 내가 내 역량이 더 뛰어나지 못해서 이것들을 멋지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면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후회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것을 잘 하는지, 나의 가치는 어디에서 가장 값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길지 않은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고 싶다.


내게 주어진 일정량의 능력과 나의 특성을 합쳐서 어디에서 어떤 가치를 실현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바보같지만 그저 하늘을 올려다 보며 기도하게 된다. 도전적인 환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완벽주의에 갇힌 바보가 되는 것보다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 가는 행복한 바보가 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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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졸업하고 4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연구실 동료와 공동으로 논문 작업을 하였고, 내 개인연구는 실험까지 끝내지는 못하고 시뮬레이션 환경을 새로 구축하며 데이터를 뽑을 준비를 마쳤다.

연초부터 해외, 특히 유럽 쪽으로 포닥을 가기로 결심하고 LinkedIn, ResearchGate를 매일같이 검색했지만, 1월 말에 연구주제가 일치하는 핀란드의 딱 한 곳을 제외하고는 적합한 포지션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 일치한다는 주제도 내 졸업논문 주제가 아니라, 막바지에 동료와 함께 새로 배워서 시작한 분야라서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은 분야였다.) 물론 일일이 주요 대학교의 관련 학과 홈페이지와 연구주제가 일치하는 교수들의 홈페이지를 하나씩 다 뒤져보며 포닥 채용 공고를 찾거나 직접 이메일을 보내 보는 방법도 있지만, 집안일에도 조금 더 신경을 쓰다 보니 그렇게까지 할 겨를이 없었다. 

연구주제가 일치하는 핀란드의 대학교에 이력서와 research statement 등의 문서를 보냈더니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와서 스카이프로 해당 교수와 두 차례 면접을 보았다. 하지만 나 말고도 지원자가 여럿 있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서 떨어졌다. 아마도 향후 연구 계획에 대해서 알고리즘 측면의 자세한 아이디어를 원했던 것 같은데, 사실 그 정도면 지금 당장 논문을 한 편 쓸 수 있는 수준으로 개념이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나는 해당 연구 주제에 대해 앞으로 재미있게 연구할 수 있는 방향성을 중심으로 설명하며,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취하겠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었기에, 아마 나보다 더 자세하게 해당 분야를 연구했던 박사가 채용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그 동안 헤드헌터들을 통해서 몇몇 대기업과 IT 기업들의 박사급 채용 진행에 대한 제의가 들어왔지만, 방향을 포닥으로 잡았기에 다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결국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 때 차라리 해당 기업들에 입사하지 않더라도 채용 진행을 미리 해 둘 걸 그랬을까?

어쨌든 집 계약기간도 끝나 가고, 상반기 중에 어디든 결정이 나서 이동을 해야겠다는 나름의 계획을 세운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정말로 하루하루 시간만 흘러가는 듯 했고, 나의 생활과 재정을 비롯한 환경의 변화가 박사과정 때와 별 차이가 없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졸업 직후에 느꼈던 홀가분함은 한달 정도 지나니 흐려졌다. 박사과정 때와 같은 연구실의 포닥으로 남아 있는 것도 내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기다리는 목적으로써의 의미는 있었지만, 이 생활 자체가 1년 이상 장기화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 가까워지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과연 맞게 가고 있을까?'


아마 결혼 전의 나 혼자만 있는 상황이었다면 고민이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나를 꽤 오랫동안 기다려 준 아내와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딸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에 대한 고민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정적으로, 둘째를 계획했지만 자연유산으로 인해 잘 되지 않으면서 아내의 몸과 마음이 더 나빠지는 것을 보면서 더이상 지난 수 년간의 똑같은 생활에 그저 나 혼자 익숙해져 있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새로운 환경으로 나가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나는 연구실 환경에 그 어느때보다도 더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지지부진하게 살면서 가족을 망가뜨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아내보다도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연구결과를 멋지게 만들고서 졸업하지는 못했고, 박사과정 막바지에 거의 죽을 것만 같은 벼랑 끝의 상황에서 겨우 졸업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늦게라도 멋진 연구결과를 만들어서 만회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만회하고픈 심정에 걸맞게 독하게 연구하는 자세를 보여주기는커녕 졸업의 안도감이라는 가랑비에 은근히 젖어들어 지난 몇 개월간 안일하게 살았던 것 같다. 오랜 기간 동안 억눌려 있던 내 마음이 수 년만에 해방되면서 오는 반작용이라서 쉽게 다잡을 수는 없었다고 변명해 본다.

결국 지도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회사로 방향을 돌렸다. 교수님을 통해서, 연구실 졸업생을 통해서, 그리고 링크드인을 통해 때마침 연락이 온 헤드헌터를 통해서 이력서를 몇몇 회사에 보냈다.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그동안 프로젝트는 이것저것 많이 해 왔기에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오히려 말이 너무 많아서 면접관이 부담을 느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아직 채용이 결정된 곳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지난 수 년간 익숙해져 있던 환경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가 더 가까이 왔음을 나뿐만 아니라 가족이 모두 느끼고 있다. 작년에 막연하게 예상했던 대로의 삶도 아니고, 올해 초에 '포닥'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나름 구체적으로 상상했던 삶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걱정스럽지 않다. 그저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질척거릴 정도로 매몰되어 있던 나의 본토(창세기의 성경구절 그대로 표현하자면, 본토 친척 아비 집)를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다시 한 번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매너리즘을 벗어 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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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일기] 2019.04.05

Life 2019. 4. 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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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29-39)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일의 책임은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갈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서, 황폐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매일성경을 통해서 최근 마태복음 중-후반부를 묵상하고 있다.
지난 2-3일 간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면서 성경에 가장 열심이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자기들만 죄의 길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제자 삼아서 죄의 길로 이끄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하나님께서) 얼마나 맹렬하게 분노하시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이미 흘러간 역사에 대한 풍부한 분석과 바울의 정리 덕분에 현대에 살아가는 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지금과 비슷하게 공부를 오랫동안 했다고 가정하면 나도 어쩌면 율법학자 비슷한 존재로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나는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그 말씀의 본질과 하나님의 심정부터 파악할 수 있었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내가 지금의 성경 지식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구원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값싼 복음으로 만들지는 않는가 생각해 본다. 매일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패배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내 영혼의 자리 일부분을 마귀에게 내어 주고 죄에 대해 여전히 둔감한 모습을 고수한다면, 나는 오늘날 재해석된 위선자이자 독사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별 일은 없어 보이지만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며칠을 살아가다 보면, 내 영혼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희미해지는 것을 본다. 굳이 얼마나 희미해졌는가 알 필요도 없이, 이미 내가 내 영혼의 양심을 통하여 알고 있는 내 신앙의 상태는 적나라하다. 이것을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덮어 놓는 것에서부터 나의 위선이 시작된다.

주님, 저의 본능적인 생각의 흐름을 따라, 목적 없이 방황하며 떠내려가고 있던 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다시 회개하오니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저를 고쳐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저에게 진짜로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되도록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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