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일기] 2019.09.17 *

Life 2019. 9. 1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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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새벽 5시 경에 설핏 잠을 깼지만 새벽예배에 가지 못하고 계속 잠을 잤다. 예전의 습관을 되돌리는 것이 쉽지 않다. 내 안에 주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절실함이 아직 부족하다.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기도가 절실한 상황인데 내가 교만한 것이 아닐까?


<점심>

추석 연휴 동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음식과 반찬을 가지고 비빔밥을 만들어서, 아내와 같이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정말 감사하다.


<세차>

일을 하려다가 즉흥적으로 실내세차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도안동으로 이동했다. 원래 실내세차만 하려고 했지만, 도착한 김에 간단하게 실외세차도 하고 싶어져서, 그냥 전체 세차를 하게 되었다. 폼건(foam gun)을 어설프게 쓰다가 시간이 금새 지나가서 전체를 세제로 덮지 못한 채 차를 닦고 있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께서 중간에 폼건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고 도움을 여러 번 주셔서 고마웠다. 다만 내가 폼건을 쓰는 것이 서툴러 보여서 알려주게 되었다고 하시는 말씀 속에서, 내가 서투르게 보여졌다는 것이 상상이 되면서 혼자 살짝 부끄럽고 아쉬웠다.

이것은 나의 고질병과도 같다. '남에게 항상 잘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별 것 아닌 상황에서도 감정의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곤 한다. 하지만 이럴 때 나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는 다음 번에 제대로 '개선'될 수 있도록 변화의 도움을 선택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더 좋다. 애초에 세차는 내 인생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고작 이런 일로 기분이 나쁠 것이 없지만, 이와 비슷하되 정도의 차이가 큰 상황은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일터나 가정이나 개인적인 인간관계 등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직면할 때, 내 자존심과 감정에 신경쓰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앞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한번 더 생각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다. 어쨌든 세차가 만족스럽게 잘 되었고, 친절한 사장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고서 기분 좋게 길을 나섰다.


<카페>

실외에 땡볕을 받아야 하고 주차할 공간도 부족한 스타벅스 대신, 그늘진 곳에 여유롭게 두 시간을 주차할 수 있는 커피더반 카페에 왔다. 커피맛은 스타벅스와 조금 다르지만 (어느 것이 더 좋다기보다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의 맛에 내 혀가 너무 익숙해졌다), 조용히 일하기에는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


<여호수아>

요즘 매일성경에서 여호수아 성경구절이 이어지고 있다. 여리고 성에서 엄청난 기적과 큰 승리를 경험했지만, 그 속에는 극소수지만 일부 지도층의 탐심으로 인한 죄악(전리품 횡령)이 드러났다. 그 죄악으로 인해 두 번째 전투인 아이성 전투에서는 어이없이 패했다. 

마치 박사 디펜스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막 졸업한 박사가, 자기와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석사과정 1년차에게 잘난 척 하면서 훈수를 두다가, 최신 논문 분석도 제대로 못해서 완전히 잘못된 방향을 제시해서 지도교수한테 어이없게 혼나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다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된 요소를 모두 제거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성 전투를 철저하게 준비해서 무난하게 승리하였다. 이번에는 전리품도 자유롭게 취할 수 있게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물질적으로도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크고 중요해 보이는 일에서만 기도하는 것과,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며 매 순간 기도하며 결정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나는 어떤 모습인가?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성령님)을 모르거나 없는 척 하며 살아가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싶다.



<받은 말씀>

욥기 7장


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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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일기] 2019.08.14

Life 2019. 8. 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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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오늘은 새벽예배에 갈 수 있었지만, 아내가 많이 피곤해해서 가지 않았다. 내가 소윤이 바로 옆에 붙어서 같이 자고 있었는데, 내가 일어나서 자리를 비우면 옆에 사람이 없어서 허전함을 느끼는 소윤이가 결국 아내가 자고 있는 위치에 가서 안기고 아내의 숙면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윤이는 잘 때나 놀고 있을 때나 항상 아내 또는 나와 피부를 맞닿아서 붙어 있으려고 하는데, 그만큼 나와 아내를 믿고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요즘같이 더운 여름에 항상 붙어 있으려고 하니 가끔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기회가 넘칠 때에 많이 안아 주고 애정 표현을 많이 해 주려고 한다.


<오전>

어제보다 조금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하였다. 소윤이도 평소보다 일찍 어린이집에 등원하였다. 어제 목욕을 했기 때문에 머리만 얼른 감고 빨리 준비해서 집 밖을 나설 수 있었다. 덕분에 평소에는 항상 점심식사 이후에 왔었던 스타벅스에 아침부터 와서 여유롭게 주차를 하고 공부하기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요즘은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독서실과 다를 바 없는 스터디카페에도 자주 갔었지만, 지나치게 조용해서 노트북을 갖고 뭔가 하기 어려운 곳보다는 적당히 소란스러운 곳이 더 좋다. 그리고 나는 주변 소음이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하기 싫은 일을 스스로 지속하는 게 싫어서 딴짓을 하려는 경향이 가장 큰 문제), 스타벅스만큼 좋은 곳이 없다. 이렇게 된장남이 되어 간다. 그러나 나의 생산성을 높일 수만 있다면 평생 된장남이 되어도 상관 없다.

에스겔 21:18-32 를 묵상했다. 죄악과 불순종으로 점철된 원래 있던 이스라엘 왕이 칼의 심판에 넘어진 뒤에, "다스릴 권리가 있는 그 사람이 오면" 왕위를 그에게 넘겨 주겠다는 말씀이 있다. 새로 세워지는 왕은 역사적으로는 바빌로니아의 침공을 받은 뒤에 바빌로니아에서 직접 세운 왕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죄와 불순종에 있는 나 자신이 내 속에 있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앉으시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예수님을 주인 삼는 것이 글자처럼 쉬우면 좋겠지만, 평생 추구하고 지켜야 하는 싸움임을 조금씩 알아 간다. 오늘 예수님을 주인 삼기 위해 애쓰기로 다짐하였다.


<전산학 박사에 대하여>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면 취업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지만, 이것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상황에서 막상 살펴 보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곤 한다. 박사학위 소지자는 경력직과 비슷하게 채용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산업계에서의 실무 경력과 비교하면 실무 수행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연구실에서 프로젝트를 많이 수행했지만, 프로젝트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보적인 수준의 구현에 머무른다. 

결국 박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장 생산 가능한 제품 개발보다는 프로토타이핑을 통한 연구개발에 가까운데, 이것을 다시 말하면 연구 측면에서 남들도 인정하는 성과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좋은 학회나 좋은 저널에 나의 연구 주제로 출판한 논문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태로 회사나 연구소, 대학교에서 해당하는 연구 주제와 일치하는 채용 공고를 내서 내가 거기에 지원해야만 내가 채용될 확률이 가장 높다.

하지만, 인생의 수많은 결정 속에서 나는 가족을 먼저 선택했고, 프로젝트를 맡을 기회가 올 때마다 다양한 분야를 배우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학교 내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을 도와 주는 일에 집중하는 등의 선택을 통해 (누군가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어진 시간 동안 내 연구 주제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에 실패했다. 프로젝트는 참 많이 했지만, 연구가 아닌 산업계에서는 그 어느 회사도 실무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컴퓨터공학의 측면에서 내가 쓸 줄 아는 도구의 수는 많지만, 특정한 한 분야에서의 전문성(expertise)으로 나를 증명할 수 없었다. 다 제쳐두고 오로지 코딩 실력 하나만 놓고 보니, 정보올림피아드 대회를 경험해 본 학부 졸업생들에 비하면 나는 코딩을 못하는 인간이 되어서 그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것저것 다 만져보며 연구실 서버들에 문제가 터지면 항상 내가 나서서 (그게 재미있었나 보다) 해결하다 보니, 내 연구주제보다는 DevOps 측면에서 오히려 더 잘하는 것 같지만, 요즘은 DevOps 엔지니어는 없어지는 추세인데 누가 뽑으려고 하겠는가?

이력서 상에서 나는 학위 기간은 평균보다 길고, 연구 실적은 많은 것 같지만 어느 한 분야에 특출나지가 않고, 프로젝트 수행을 많이 한 것이 그나마 봐줄 만 하지만 그것도 분야가 여러 갈래이고, 요즘 거의 모두가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인공지능이나 머신러닝 쪽으로 경험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내가 채용 담당자라고 해도 다른 박사의 이력서와 비교하다 보면 내 이력서를 거를 지도 모르겠다. 이력서의 문맥 사이에 감춰져 있는 나의 구구절절 스토리를 누가 알아 주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자기연민이나 하며 계속 절망해 있으면 진짜로 나는 패배자가 될 뿐이다. 과거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울증이 심각해져서 기한이 임박한 일조차 미루면서, 자기 비하를 멈추지 못하면서 인생을 허비하던 내가 최근 들어서야 그 악순환에서 벗어났다. 다시 자기 비하의 늪으로 돌아갈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인공지능 관련 지식을 거의 컴퓨터와 연관된 거의 모든 회사에서 요구하기 때문에, 일상의 시간 중 일부를 떼어서 머신러닝 관련 지식과 도구 사용법을 습득하는 데 할당하면 되는 일이다. 박사까지 하고 보니,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동영상 강의를 듣고 기억해 뒀다가 똑같이 따라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강의들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것 하나를 정해서 그저 따라하면 된다. 코딩 실력도 알고리즘 분야별로 가르쳐 주는 동영상 강의와 문제 샘플과 풀이가 넘쳐나니, 그저 따라하며 이해를 하면 될 일이다. 온라인 문제 사이트에서 몇 개를 풀어 보니, 코딩 속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지는 것 같으므로, 그냥 이것저것 쓸데없이 많이 생각하지 말고 해 보면 (just do it) 된다. 

마지막으로 논문을 한 편 쓰고 있으니, 이것도 쓰기 싫더라도 참고 써보자는 생각을 갖고 그저 손을 움직여서 실험을 하고 글을 쓰면 된다. '왜 나는 제대로 논문을 써내지 못할까?', '벌써 졸업하고 나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난 논문 완성도 못하고 뭘 했나?'와 같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 때문에 오늘 해낼 수 있는 일도 내일로 미뤄지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오늘 논문 쓰는 것이 하기 싫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서 꾹 참고 조금만 고쳐 보자. 여기까지만 고치고 게임 한 판 해야지'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임을 경험한다.

어제 또는 그저께와 비교할 필요도 없다. 오늘 주어지는 하루는 그냥 오늘일 뿐, 내가 개선되는 것에만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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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일기] 2019.04.05

Life 2019. 4. 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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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29-39)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일의 책임은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갈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 집은 버림을 받아서, 황폐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매일성경을 통해서 최근 마태복음 중-후반부를 묵상하고 있다.
지난 2-3일 간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면서 성경에 가장 열심이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자기들만 죄의 길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제자 삼아서 죄의 길로 이끄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하나님께서) 얼마나 맹렬하게 분노하시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이미 흘러간 역사에 대한 풍부한 분석과 바울의 정리 덕분에 현대에 살아가는 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지금과 비슷하게 공부를 오랫동안 했다고 가정하면 나도 어쩌면 율법학자 비슷한 존재로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나는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그 말씀의 본질과 하나님의 심정부터 파악할 수 있었을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내가 지금의 성경 지식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구원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값싼 복음으로 만들지는 않는가 생각해 본다. 매일 이 세상의 삶 속에서 패배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내 영혼의 자리 일부분을 마귀에게 내어 주고 죄에 대해 여전히 둔감한 모습을 고수한다면, 나는 오늘날 재해석된 위선자이자 독사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별 일은 없어 보이지만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며칠을 살아가다 보면, 내 영혼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희미해지는 것을 본다. 굳이 얼마나 희미해졌는가 알 필요도 없이, 이미 내가 내 영혼의 양심을 통하여 알고 있는 내 신앙의 상태는 적나라하다. 이것을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덮어 놓는 것에서부터 나의 위선이 시작된다.

주님, 저의 본능적인 생각의 흐름을 따라, 목적 없이 방황하며 떠내려가고 있던 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다시 회개하오니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저를 고쳐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저에게 진짜로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되도록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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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영역을 막론하고 특정한 쪽의 극단보다는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균형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신앙의 균형은 특히 요즘의 내 삶 속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처음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주요 성경구절을 통해 구원의 교리를 알게 되었을 때의 희열은 놀라웠다. 말주변 없고 왜소하고 대인기피 증세도 있던 내가 매일 별 의미없이 보내던 10대 시절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흔히 말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라고 하는 시점 이후로 내 삶에 물리적인 변화는 별로 없었지만, 이상하게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 구절과 찬양의 가사부터 생각하고 혼자 즐거워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잘 모르면서 진지하게 생각했는데, 신앙 교리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매우 얕았지만 열정만큼은 넘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마치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기쁨이 생겨나는 듯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쁨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고 아기를 키우며 박사과정 졸업을 준비하는 지금 내 시점에서 10대와 20대 싱글일 때의 패기 있는(?) 신앙의 열정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생각해 보면 '사랑'의 특성일 수도 있다. 처음 사랑할 때의 기쁨은 정말 놀랍고 세상이 달라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누군가와 연애할 때와도 비슷하다. 그 사랑이 최고점에 이르러서 결혼을 하고 결실을 맺어서 가정을 이루고 아기를 키우기 시작하니, 여전히 똑같이 사랑하는 아내이고 사랑하는 자녀이지만 처음과는 다르다. 맨 처음 시작할 때처럼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랑이 샘솟고 그 감정이 지속되면 가장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의지'를 동반한 노력이 필요해지는 것 같다.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치여서 유지되지 않을 때, 나는 내가 저절로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처럼 사랑이 샘솟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고, 나는 왜 (잘 믿는다고 생각되는) 남들처럼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오해의 불길은 내 삶의 근본적인 소명, 즉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동기부여를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불길로 크게 번졌고, 지금의 대학원 생활에서 성취해야 하는 것(박사학위)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인 결핍은 10대 때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 때와 종류만 다를 뿐이지 현실적인 결핍은 똑같이 있다. 한창 신앙의 열정이 커져갈 때에도 내 성격과 외모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찔렀었다. 지금은 내 실력부족과 실력부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의지박약까지 싸잡아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못마땅하고 싫은 상태지만, 결국 결핍이 인생 내내 존재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하지만 부족함 속에서도 결혼 생활을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신경쓰는 것을 사실은 신앙에서도 똑같이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신앙에서만큼은 여전히 '저절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요즘은 그게 안 되는지를 너무 골똘히 생각하느라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의지를 다짐한다. 처음 사랑할 때의 기쁨에 힘입어서 초반에 저절로 삶이 살아지는 것 같겠지만, 알다시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크기의 자극에는 매우 빠르게 적응을 하며,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되지 않게 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바울이 위의 말씀을 비롯한 여러 편지를 통해서 항상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사실상 명령하다시피 가르친 것도, 신앙생활이 마냥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신앙의 기쁨은 내가 의지적으로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이지, 한 번 믿고 나면 저절로 발동되는 패시브 스킬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끝까지 격려해 주시고 도와 주시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시지는 않는 젠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 그에 맞게 호응해서 합을 이루기 위해 나의 의지와 노력, 호응도 필요하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물론 내 의지만으로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도 못하는 내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을 좀더 많이 배려(?)해 주시는 것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신앙의 기쁨이 솟아나고, 그 기쁨을 동력 삼아서 내 삶의 동기 부여도 무한정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쪽으로 균형을 더 맞춰서 전인적인 신앙생활을 통한 삶의 긍정적인 발전을 이끌어 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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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너무 답답해서 내 진로와 지금 박사과정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해 보았는데, 단순히 나 자신의 경제적 이익 추구만으로는 더는 설명이 되지 않는 듯 해서 신앙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해 보았다.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고, 나도 지금의 내 상태에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어떻게 다듬어지고 발전해 갈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걸어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삶에 큰 틀에서나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그 과정에서 최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근본적인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들을 끄집어 내어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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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할 만큼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선택의 문제들이 알고보면 중요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뜻?

-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가복음 12:30-31)

- 남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는 것.

-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데 힘쓰는 것.

- 그외 다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흔히 말하는 선택 문제:

- 졸업하고 회사로 갈지 연구원으로 갈지?

- 졸업하고 해외로 포닥을 다녀올지 바로 취업할지?


어딜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미 확실하게 자기 뜻이라고 성경에 말씀해 주신 것들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만 해도 할 일이 가득하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겠다,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겠다, 눈동자와 같이 너를 지켜보고 보호한다고 성경에서 여러 번 약속하셨다)


진로 등의 선택의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어느 선택이 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예측이 잘 안되니까 그렇다. 주식도 전세계의 전문가들이 안간힘을 써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단기간에 일어날 변화를 예측해서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는 정도야 하겠지만, 확신을 가지고 어느 한 곳에 장기적으로 믿고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내 욕심, 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이미 약속을 하셨다. (마 6:26-28) 그러니 어디를 선택해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차이가 없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28)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것이 하나님의 확실한 뜻이다. 이 하나님의 뜻을 달성하기에 어느 선택이 적합한지 생각해 보고 선택하면 된다. 모르겠으면 어딜 가나 비슷하다는 의미이므로 그냥 아무거나 고르면 된다.


내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자기 이익을 챙길 수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는 정도는 기본적으로 할 능력이 있다. (인간의 생존 본능)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예배자의 모습인지,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인지,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태도인지 아닌지 답을 해 보자. 의외로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이 세상에서의 선택 문제는 알고보면 내가 어디서 어떤 손해를 볼 것인지 예측이 안되기 때문에 내 이익의 기대치가 정확히 계산이 안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별 상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말씀을 안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솔직하게 스스로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선택해라.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시고, 주위 사람의 의견과 자신만 남게 된다. 하나님께서 상관하시지 않는데 주위 사람들의 의견에 너무 영향받지 말고, 정말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자. 그 대신, 하나를 선택하고 난 후에도 계속 하나님께서 이미 확실하게 말씀해 주신 뜻들을 이루고자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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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죄 짓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하는 것인지는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라. 그것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올라오는 양심의 호소는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공부하고 말씀 묵상하면서 배웠던 것들이 양심에서 발현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반론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해라. 문제는 이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죄의 유혹 때문에 매우 어렵다. 이 선택은 정말 피 흘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선택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고, 무엇을 선택할지 이미 아는 상태에서 올바르게 선택하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올바른 선택을 지켜내고 피 흘려 승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자.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선택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연봉 약간의 차이와 복지의 차이, 지역의 차이 등은 그냥 스스로 생각해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솔직하게 골라라. 하나님께 떳떳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골랐다고 기도하고, 그 선택 이후의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지켜내는 선택에 최선을 다 하자.


내가 박사과정을 선택해서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연구를 잘 못하는 상태를 쓸데없는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탓하지 말자. 하나님의 뜻이 어쩌면 박사과정 진학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로 내가 다시 돌아가서 박사과정 대신 정부출연연구소에 전문연구요원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더라도 상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박사과정 진학하고 나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해 주신 단순하고 정확한 뜻을 내가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거시적으로는 그래 왔던 것 같지만, 매일의 삶에서 의외로 자주 넘어진다. 내 생각을 통제하지 않고 죄된 마음을 지속적으로 묵상하게 내버려둔 적이 얼마나 많은가? 별 것 아닌 일로 생겨난 분노를 통제하지 않고 계속 키워서 정신 건강을 해친 적도 많고, 세상 돌아가는 게 궁금해서 뉴스를 보면서도 이곳 저곳에 있는 자극적인 미디어를 가감 없이 소비하며 마음을 음란한 생각에 내버려두는 경우도 많다. 부정한 행동인지 아닌지 알고도 행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내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연구를 해 나가면서 얻는 즐거움을 추구하면, 그렇지 않은 작고 왜곡된 즐거움은 결코 내 마음 속 공허함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연구가 즐겁지 않은 이유를 찾아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최대한 하나님의 뜻과 근본적인 지식 탐구의 즐거움에 집중하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인생의 다른 영역들(가족, 휴식, 다른 사람들과의 socializing 등)로도 나의 근본에서부터 출발하는 즐거움이 흘러가서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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