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고 기계적인 일은 직접 하지 않고 가능하면 석사과정에게 시키는 것이 박사과정이 가져야 할 능력일까?
위와 같은 이상한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 내가 관리해야 할 연구과제 수가 여럿 있고, 각 과제마다 중요하면서 오래 걸리는 일과 덜 중요하지만 빨리 처리할 일들이 있다.
- 중요도/긴급함과 전혀 상관 없이, 그동안 내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시키려면 시킬 대상에게 개념과 도구, 각종 용어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해 주고 나서야 시킬 수 있는 일들이 꽤 많이 있다.
- 결국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자료를 전달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 노력 + 후배가 일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내가 그냥 직접 처리하는 것이 더 빠르다고 판단되면, 나는 그냥 내가 일처리를 하고 만다.
- 지도교수님이 보시기에는 박사과정 고년차가 되어 자기 연구에 집중해야 되는데 과제의 소소한 작업을 처리하느라 바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석사과정들에게 일을 좀 잘 시켜 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일차적으로는 교수님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하고, 그만큼 내가 context change 없이 개인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니까 일을 잘 시키는 것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제 때에 적절한 일들을 석사과정들에게 시키지 않으면, 그들이 제 때에 적당한 일들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연차가 올라가서는 오히려 그 연차에 걸맞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처리가 되지는 않고, 항상 플랜 B가 필요한 경우가 더 많다. 정작 급하게 일을 시키고 싶을 때 생각처럼 빠르고 간단하게 업무를 지시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내가 시키려는 일에 대해서 후배가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추가적인 공부가 필요한 경우가 되겠다. 사실 이것은 후배들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향한 지적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그 후배가 나와 연구 진행 상황에 대한 동기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해서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일을 시킬 때, 뭘 어떻게 시켜도 알아듣지 못하고 진행을 못할 정도로 실제로 능력이 부족한 경우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은 시키는 사람의 입장에서 목표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일을 자세한 task item들로 나눠서 어떤 도구를 쓰고 어디를 참고하라는 정도의 내용을 알려 주면 꽤 완성도 있게 일을 처리해 준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메일을 쓰거나, 문서에 work item을 나열하기 시작하면 그걸 시키는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는 데에만 꽤나 오래 걸릴 때가 있다. 그 시간에 차라리 내가 일을 시작하거나 프로그램을 돌리면 진작 끝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학생에게 일을 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지금 이렇게 가르쳐 둬야 나중에 비슷한 업무를 더 적은 노력으로 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목표가 설정된 업무를 효율적으로 시키려면 결국 평소에 미리 노력해서 후배와 일부러 토의를 하고, 지도교수와 토의한 결과나 과제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그때 그때 갱신시키는 수밖에 없다. 적당히 바쁘지 않을 때 미리미리 후배를 성장시켜 놓아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이쯤 되면 내가 박사학위도 없으면서 지도교수 노릇을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나는 여전히 일단 무슨 일이든지 내 선에서 내가 알아서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일이 넘쳐서 누군가에게 일을 시켜야 할 때가 되면 대부분 내가 시키려는 일의 디테일을 모르기 때문에 누구에게 맡겨야 좋을 지 고민이 될 때도 많다. 어떤 일들은 오히려 지나치게 간단해서 시키는 노력은 별로 들지 않지만, 그로 인해 시간이 더 걸려서 일이 전체적으로 밀리는 경우도 있다.
나 혼자 능력을 키우는 것과, 어떤 단체 속에서 단체를 함께 성장시키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나 혼자 능력을 키우는 것은 전적으로 내 시간관리와 내 책임으로 다 귀결되는 데 반해, 단체가 함께 성장하려면 치밀한 조직관리 skill이 필요하다.
적어도 나는 나중에 어느 회사나 연구소를 가든지 중간관리자 이상의 위치에 갔을 때 실무자의 실무적인 이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
다. 적어도 그 실무자가 하려는 일을 내 선에서 내 능력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실무자와 토의를 해서 가장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나는 이러한 욕심이 과도해서, 후배들에게 너무 일을 나눠주지 않고 나 혼자서만 능력을 키우려는 이기주의에 잡혀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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