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얼마 전에 후배들이 고생하고 있던 국제학회 논문 작업에 갑작스럽게 due date를 5일 앞두고 참여했고, 결론적으로 논문 제출까지 어떻게든 성사를 시켰다. (그게 accept될 지는 알 수 없고, 현실적인 어려움도 크지만, 적어도 not bad라고는 말할 수 있는 레벨이었다.) 그런데 내가 내 졸업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개인연구와 이를 위한 저널논문 작업은 거의 1년 반이 되도록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나의 생산성은 어째서 이런 엄청난 극단을 찍고 있는 것일까?

이대로라면 내 연구 주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내가 내 개인연구를 대하는 태도가 심각하게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 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후배들과 같이 작업한 이 논문이었다.


이번에 후배들과 같이 작업했던 (원래 후배들이 이미 거의 5-6개월 전부터 연구를 시작해서 고생하고 있던) 논문을 작업하던 당시의 상황을 한번 되짚어 보았다.

  •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due date를 5일 남기고 지도교수의 요청에 의해 투입되었다. 
  • 그나마 후배들이 작성하던 이쪽 연구내용을 처음 구상할 때의 미팅에 몇 차례 참여했고, 후배들과 연구실에서 평소에 얘기를 나눴었기에 논문의 목표와 문제정의를 알고는 있었다.
  • 하지만 관련 분야 연구의 디테일은 약했기 때문에 후배들을 제대로 가이드하기 위한 related work가 절실했다. 5일 동안 우리 논문과 직접 연관된 논문 약 30편, 직접은 아니지만 작성 과정에서 참고하기 위해 약 10편, 합쳐서 약 40편 가량의 논문을 말 그대로 읽어'제꼈'다.
  • 연구내용을 따로 정리할 여유가 없어서, 오직 각각의 기존 연구 논문을 읽을 당시의 집중력과 기억에만 의존해서 바로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로 바꿔서 논문 여기저기에 써놓았고, 그걸 나중에 앞에서부터 읽어내려가면서 논지에 맞는 말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절반 가량은 버렸다.
  • 이미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실험은 꽤 진행해 두어서 데이터가 있었지만, 그걸 설명하기 위한 구조 설계와 방법론에서 많은 보완이 필요한데 지도교수님도 그 부분은 제대로 확인해 주시지 않았기에 (새로운 패러다임 같은 거라서 vision 제시에 몰두하셨지만, 그걸 실현시키려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시도에 대한 지적에서 교수님의 일관성이 없었다. 교수가 학생이 아는 전체를 똑같은 수준에서 다 알기에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너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임) 지도교수의 vision과 후배들의 구현 사이를 최대한 이어붙이기 위한 설계를 매일 고쳤고, 제출 직전 몇 시간 전까지 구조 설계를 후배들과 같이 토의했다. 제대로 된 연구라면 당연히 좋은 방법이 아니다. 뭐 일단 완성해서 제출해야 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 나름대로의 실험 결과가 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지도교수와 이야기해서 승인받고 진행하기에는 즉시 만날 수가 없어서 너무 느렸기에 내 선에서 후배들과 계속 얘기해서 '이 결과를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 계속 검토했다.
  • 서론과 바로 다음 섹션인 Motivation(연구의 필요성) 부분을 내가 전적으로 맡아서 썼고, 지도교수가 시나리오가 틀렸다고 하면 작성했던 시나리오 전체를 폐기처분하고 새로 썼고, 그게 실제로 실험했던 내용과 일치하는지 후배들과 틈틈이 검토했다.
  • 이미 써둔 부분에 대해서도 수정할 곳이 눈에 띌 때마다 고쳤는데, 결국 시간이 부족해서 전체를 다 내가 직접 수정할 수는 없어서 후배들에게 "이렇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했다"고 내용을 통째로 만들어서 그걸 영어로 써 달라는 구체적인 요청을 해서 검토하지 못한 부분을 마무리지었다.
  • 원래 개인적으로 쉬면서 포털 사이트 뉴스와 SNS를 보는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이 넘었는데, 이 작업을 진행하는 5일 동안 뉴스와 SNS를 보는 시간이 거의 없었. 사실 논문을 찾다가 얻어걸린 알파고 인공지능 관련 뉴스 기사가 하나 있었던 기억은 난다. 어이없는 것은, 그 쪽의 기술 진보가 신기해서 바쁜 와중에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 회사가 업로드한 arxiv 최신 논문을 또 읽어 보았. (...)
  • SNS 하는 시간 자체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웃기게도 좋아요를 누르거나 내가 직접 포스팅을 쓰는 등의 활동에는 차이가 없었다. 즉, 한번 좋아요/댓글 등으로 반응했던 것을 또 보거나, 의미 없이 반복적으로 하던 눈팅이 논문 쓰는 동안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비록 후배 두 명과 같이 작업했고 이미 논문의 전체 뼈대와 실험 결과가 어느 정도 나와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논문을 제출하기 전 5일 동안 나는 '아, 내가 알고보니 이 정도까지도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즉, 반대로 말하면, 내가 졸업하겠다고 선언한 나만의 연구주제에 대해서 거의 1년 반 동안 정말로 형편없는 집중력을 보여 주었음을 증명해 주는 생생한 반례가 되었다.

----------
생각해 보니 비슷한 사례가 작년에도 있었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하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던 후배가 재학 당시에 국제학회에 제출했던 (그 때도 내가 2저자로 같이 참여) 논문이 아쉽게 떨어지고 마침 후배는 졸업해서 나가는 바람에 리뷰를 보완한 후속 논문을 쓴다면 내가 혼자 작업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지도교수님에 의해서 '어디어디 학회에 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당 국제학회 제출 마감 약 일주일을 남겨 두고 받게 되어서, 일주일 동안 실험을 더 하지는 못하고 대신 글을 많이 고쳤다. 특별히 서론의 시작 부분인 연구의 배경과 필요성 부분을 새로 썼고, 나머지 부분은 논리 진행을 유지한 채 문장과 표현만 바꿨다. 그렇게 해당 학회에 발표 게재가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나는 지금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있는 그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실제 실험환경을 세팅해 놨다가 문제정의를 설명하지 못해서 개발을 중단하고 시뮬레이션 환경으로 포팅하던 중이었다. 기존의 실험 환경을 그대로 시뮬레이션으로 옮기는 것도 오래 걸렸지만, 새로운 문제정의에 맞게 보완하는 작업은 아직도 하고 있다.

----------
왜 이런 것일까?
내가 온전히 책임을 질 수 있고, 그 책임으로 인한 피해가 나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는 내가 너무 마음을 놓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내가 책임감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위치에서는 그 반대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최근에 5일 만에 끝낸 논문 작업에 처음 투입되었을 때, 그 논문이 목표로 하는 학회는 분산시스템 분야에서 top을 달리는 유명한 국제학회였다. 내가 처음 투입되던 그 때의 논문의 작성 상태나 후배들과 지도교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으로 인해 후배들이 제출할 수나 있을지 회의적인 마음이 컸었다. 무모한 도전이었고, 미친 짓 같아 보였다. 
나 스스로 내가 뭐하러 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가 하는 생각을 가졌을 법도 한데, 오히려 정 반대였다. 그 때 나는 이걸 뜯어고쳐서 "적어도 이 국제학회에 제출해도 부끄럽지는 않을 만한 구색을 갖춘 논문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이상한(?) 목표의식이 생겨서, 스팀팩 맞은 테란의 마린마냥 날뛰었다. (...변태인가?) 후배들과 지도교수 사이에 거의 싸움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그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고, 후배들에게 결과물을 성사시켜 주고 싶었고, 이번 기회에 지도교수와 이 분야 연구하는 학생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간격을 최대한 좁혀야겠다는 쓸데없는 사명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개인연구 주제로 논문 제출이 끝나면 바로 저기 후배들 연구에 뛰어들어서 공동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그게 강제로 실현되다 보니 마음껏 날뛸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내 것을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얼마 전의 그 5일 동안 느꼈던 이상한 희열(?)을 사실 내 개인연구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게 참 어렵다.
내가 남들이 연관되어 있는 일에 대해서는 긴장감이 확 높아지는 반면에 나 자신만의 목표의식에 대해서는 역설적으로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일까? 잘 하지 못해도 그 피해가 나를 넘어가지 않으면 그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쓸데없는 겸손 탓일까? (사실 이쯤 되면 겸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니면 혹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 때문은 아닐까?

이번 겨울이 마지막 기회인데,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야겠다.
나의 동기부여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걸 나 자신의, 내 인생을 위한 목표나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소명의식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를 잘 생각해 보고 내 개인연구에서도 목표를 향해 쉼 없이, 그리고 즐겁게 달릴 수 있기를 바란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Bryan_

,
반응형

박사과정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와닿는 속담이 있다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공통적으로는 잠재적으로 가치가 있는 자원을 많이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정리하고 다듬는 등의 행동을 통해서 실제로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의미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논문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논문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 동안 관련 분야에서 읽었던 논문들을 잘 정리하고 문제를 정의해서, 나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한 편의 논문을 만드는 과정이 구슬을 꿰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러 분야(사실 이 "여러 분야"가 문제다)에 대해서 많은 논문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논문을 보면 석사과정 때보다 짧은 시간 안에 논문의 요점과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 논문이 출판이 안 된다면 그동안 논문들을 읽어서 쌓아 놓은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다가 그동안 열심히 읽었던 논문들 중에서도 실제로 내가 졸업하는 데 필요한, 나의 개인연구 주제에 관련된 논문들만 놓고 보면 논문의 개수가 줄어든다. 그 뿐만 아니라, 그동안 개인연구 주제로 만들었던 논문을 조금씩 고쳐서 제출했다가 reject 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급한 불을 끄느라 동향 분석이 자꾸 미뤄지면서 "오래 되어 낡고 빛이 바랜 구슬"이 되어 가고 있다.

사실 내 논문이 reject 되었을 때 철저하게 분석해서 그 때 논문들을 새로 싹 정리하고 최신 논문들을 끊임없이 읽어서 정리해 두는 부지런함이 필요한데, 논문을 읽어 놓고 머릿속에 둔 채 방치했다가 점차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해서 파일 시스템 어딘가에 묻혀 있는 상태인 경우도 많았다.


내가 꼼꼼한 척 하면서도 무언가 하나를 할 때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과거의 습관으로 인해서, 지금처럼 졸업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나의 개인연구 역량을 뿌리째 흔들고 있는 것만 같다. 이대로 계속 가면 안 그래도 기초가 부실한데 결국 논문을 내지 못하고 버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니 오히려 내가 원래 연구하던 무선 모바일 네트워킹/라우팅 말고 지난 4년여 간 연구과제 실무책임을 맡으면서 타의에 의해서 습득한 소셜 컴퓨팅 쪽 지식을 정리해서 연구를 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평소에 과제는 과제대로 수행하고, 나머지 시간을 최대한 잘 써서 내 개인연구를 게을리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는 그동안 항상 과제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개인연구할 시간은 항상 뒤로 밀렸으며, 그마저도 개인적인 일들과 가정 등에 밀려서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것이 지금의 나에게 더 큰 부담이 되어서 돌아왔다.


정말 인생이 쉽지 않다.

나의 부족한 노력과 체력, 그로 인한 연구역량 저하를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겠는가?

정말 박사과정은 처절할 정도로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해야만 하는데,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인 것일까?

어쩌면 나는 박사과정이 내 적성에 안 맞는 것이었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기에는 너무 심하게 늦었다.


어쩌다 보니 인생의 진도를 반대로 해서 결혼에 육아부터 먼저 시작해 버린 지금의 상황에서, 그렇다고 가족의 우선순위를 마냥 최하로 미루지도 못한다.

연구실에서 수행하는 여러 개의 과제를 최대한 덜 하려고 해도 이것조차 내가 그 동안 항상 나를 중심에 두고 모든 일처리를 하는 나쁜 습관 때문에 일에서 쉽게 빠지지도 못하고 있다. 그나마 교수님께서 많이 배려해 주시고 최대한 과제 일에서 빠지도록 해 주시는 것이 심리적인 위안이 될 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일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결국은 내가 내 스스로 manage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내 습관과 과오를 곱씹으며 그때 좀더 잘 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할 만큼의 여유도 없다. 정말 내 모든 주의를 개인연구에 집중시켜서 빨리 논문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시기이다.


아무래도 아래의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 연구실의 연구과제가 정확히 내 개인연구 주제와 일치하는 경우는 국내에서는 거의 없기 때문에,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축복이다) 과제에 너무 목숨을 걸고 여기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다 쏟아서는 안된다. 명심하자. 나 자신의 노력과 나의 시간은 한정된 자원일 뿐더러, 개인연구에만 투자해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자원이다. 중요한 곳에 우선순위를 두고 아껴 써야 한다.
  • 괴로워도 내 개인연구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나만의 익숙한 체계 (언제든지 무의식적으로라도 꺼내서 확인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물리적이든 사이버 공간이든 관계 없이) 안에서 꾸준히 정리해 두어야 한다. 당장 연구과제 연차평가가 내일이라고 하더라도 내 개인연구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묻어 두면 안 된다. 경험상 3일이 넘어가면 잊어버리기 시작하고, 다시 흐름을 복구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며, 그러다가 보면 당장 하고 있는 실험 코딩을 하면서도 그것을 왜 하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마저 놓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 당장 어딘가에 제출하지 않더라도, 내 개인연구 주제 또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항상 논문 형식으로 미리 만들어서 글을 조금씩 채워 놓아야 한다. 그게 단순한 메모 조각이어도 상관 없이, 논문의 틀에 어떻게든 글자들을 밀어넣어 두면 나중에라도 거기서부터 고쳐서 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하나도 쓰여있지 않은 채로 갑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due date가 잡히더라도 시간 안에 끝내지 못한다.


이제부터라도 구슬 서 말을 꿰어서 보배를 만들어야 한다. 구슬이 빛이 바래고 오래 되었으면 미련없이 버리자. 그렇게 해서 꿰어야 할 구슬이 모자라면 빨리 새로 모으자. 한번에 너무 크고 화려한 것을 만들 생각은 버리고, 졸업을 위한 최소한의 가치와 최단기간의 노력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생각을 하고 움직이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Bryan_

,
반응형

가끔 내 개인연구와 관련해서 일하다 보면, 지금 하고 있는 그 작은 일 말고 그 일을 끝냄으로써 시작하게 될 그 다음 작업들과 또 그 다음으로 이어서 할 작업들... 이렇게 어떤 궁극적인 목표(예: 논문 완성, 샘플 앱 완성)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단계들을 미리 한번씩 다 생각해 보면서 쓰지 않아도 될 정신력을 미리 쓰면서 마음이 빨리 지치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런 염려(?) 때문에 목표가 분명하고 due date가 확실하면서 또 너무 길지 않은(2-3일 정도) 일들은 지금껏 잘 처리해 온 것 같다. 예를 들어, 제안서 작업은 제출날짜가 확실하고, 보통 본격적으로 작성을 시작해서 끝내기까지의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으며, 보통은 다음 회의 전까지 만들어야 할 내용의 범위와 수준이 정해져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용 자체가 어려울지언정 그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밑그림을 대충 그리다 보면 결국 몇 시간 뒤에는 어느 정도 그럴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에 수반되는 내용도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반대로 due date가 탄력적이고, 문제정의도 하기 나름이고, 그로 인한 해결의 범위(solution space)에 제한이 없어지는 종류의 일을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발짝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지쳐 버리는 나를 발견한다. 대표적인 예가 내 개인연구 주제에 대한 논문 작업(!!)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될 중요한 일인데 오히려 제안서를 쓸 때나 연구과제의 실적보고서를 만들 때와 비교하면 정말 형편없는 생산성을 보여줄 때가 너무 많다. (내가 박사과정이 자꾸 길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기에 추가로 하지 않아도 될 자책, 왜 나는 나의 지금과 같은 인생의 단계에서 아직도 이 정도밖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한탄을 하기 시작하면, 안 그래도 부족한 정신력을 더 빨리 소비해 버리고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 날은 잠도 빨리 들지 못하고 일도 못하고 먼저 지쳐버린 마음이 몸까지 지치게 만드는 정말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어 놓고 다음 날을 시작하곤 한다.

이와 관련된 연구도 있듯이, 정말로 내 머릿속의 집중력은 고갈되거나 채워지는 한정된 자원임을 매일 느낀다.


결국 대학원에 있으면서 연구실 전체를 위한 제안서만 잘 써내고 내 개인연구의 생산성은 무식하던 석사2년차 때나 결혼 준비하던 그 바쁘던 때만도 못한 비대칭적인 인력이 되어버린 것도, 결국 내가 나 자신의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잘 아껴서 관리하지 못해서 얻게 된 문제는 아니었을까?

내가 수시로 지금이라도 박사과정을 그냥 중단하고 지금껏 연구실에서 습득해 온 개발 능력을 조금만 더 다듬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어딘가에 취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매일 너무 쉽게 지쳐 버리는 내 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오늘은 집도 학교도 아닌 곳에 나 자신을 격리시켜 놓고 내 상태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사실 개인연구를 하려고 이렇게 스스로를 격리시켰는데, 또 위의 상황처럼 마음이 지치려고 하는 것 같아서 도대체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책상에 앉아 있는 나를 그냥 둔 채, 마치 유체이탈을 하는 것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나 자신을 관찰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는 이 시간이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지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 글쓰기가 끝이 나면 다시 내가 하려던 개인연구의 작은 단계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책도 있다는 것(최고의 휴식, 구가야 아키라 저)도 알게 되었고, 그냥 잠깐의 고민도 없이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아마 읽어 봐야 알겠지만, 쓸데없이 지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정신력과 집중력을 다 소비해 버리는 나 자신을 더 이상은 방치하고 싶지 않다.


항상 남들이 보기에 바쁘기만 하고, 누군가를 특별한 업무적인 목적 없이 만나려고 하면 오히려 업무상의 미팅보다 더 쉽게 만나기 위해 나서지 못하는 내 모습은 분명히 어딘가 잘못되었다. 아직까지는 그 피해를 나 자신만 받고 있지만, 조만간은 이 피해가 내 가족에게 돌아가고, 나와 연결된 작은 사회에 영향을 끼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 자신을 챙기고 변화로 이끌고 싶다.

더 이상은 나 자신을 세상 모든 염려를 다 떠받들고 나 자신을 향해 모든 정신적인 희생을 집중시키는 '아틀라스'와 같은 포지션에 내몰고 싶지 않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앞으로 조금 더 실제적인 노력을 해야겠다. 조금만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보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Bryan_

,
반응형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을 쳐다보면 굉장히 바쁘게 쉴 새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열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열심히 무언가 하는 것은 맞지만, 생산성이나 결과물 측면에서는 열일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발생한다.

실제로 멀티태스킹이 생산성에 좋지 않다는 연구 결과도 찾아보면 많이 있고, 그냥 직접 멀티태스킹을 해 보면 어느 정도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회가, 특히 대학원 환경이 나에게 멀티태스킹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석사과정 때는 수업을 들으면서 동시에 연구실에서 공부하라고 주는 논문들을 읽고, 가끔 연구과제와 관련해서 지시하는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만약 연구실에 과제가 여러 개 있다면 과제 개수에 비례해서 서로 호환되지 않는 일처리 개수가 늘어난다.


박사과정이 되면 수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만, 일단 개인 연구가 마치 백그라운드 프로세스처럼 절대로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 (관련 분야 논문을 읽거나, 해야 할 실험을 하거나, 논문을 조금씩 고치거나) 그리고 다른 어떤 일이 오더라도 이 개인연구는 절대 놓아서는 안 된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ㅠㅠ 개인연구가 다른 덜 중요하면서 대신 더 급한 일처리에 침범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박사과정에게 연구과제는 조금 더 관리 측면에서 신경쓸 것이 많아진다. 교수님뿐만 아니라 재정을 지원해 주는 갑(정부 또는 회사), 때로는 과제의 규모가 좀 클 경우 과제 내의 다른 연구팀(다른 교수님들의 연구실, 참여기업 등)과 수시로 연락해서 일정을 조율하고 연구내용을 서로 맞추고, 진행상황을 검토하는 등의 일들을 해야 한다. 보통 1년 단위인데 연초에는 제안서를 쓰고 과제 제안 발표자료를 만드느라 바쁘고, 중간에는 정기적으로 회의를 소집해서 진행해야 하고, 가을 쯤에는 중간 진도점검 준비를 하느라 바쁘고, 연말에는 연차보고서와 연차평가 발표자료를 만드느라 바쁘고, 만약 뭔가 연구개발 결과물을 구현하기로 계획되어 있다면 프로그램 개발을 하느라 바쁘다. 이런 연구과제가 1개만 있으면 괜찮은데 2개 이상으로 늘어나면 그 때부터는 정신이 없어진다. 게다가 연구과제가 다루는 내용이 내 개인연구와 관련성이 낮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_=

여기에 후배이자 공동저자인 석사과정 학생들의 논문도 봐 주고, 가끔 연구내용을 가지고 특허 출원도 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수시로 나에게 다가오는데 이것들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열심히 바쁘게 이것저것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지속되기도 한다.


최소한 연구 주제 1개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그 안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싱글 태스크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연구과제를 단 1개만 제대로 집중해서 진행할 수만 있다면 그 연구과제는 꽤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연구과제를 단 1개만 하고서 연구실 운영을 제약 없이 해낼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멀티태스킹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직장생활을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해 본 직장에서의 생활도 멀티태스킹을 강요하기는 매한가지인 듯 하다. 결국 지금 멀티태스킹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최대한 싱글 태스크처럼 잘 해내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말이 전략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 들어 보았을 만한 뻔한 방법을 쓰면 된다. 일을 중요도와 시급성 두 축을 기준으로 4등분해서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에 맞추어 처리하면 된다. 이것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아니라, 알고 있는 대로 일의 우선순위를 잘 매겨서 그대로 진행하는 "실천을 하고 못하고의 차이"일 뿐이다.


트렐로(trello)를 이용해서 내 앞에 주어진 수많은 일들을 분류하고 중요도와 시급성을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매겨 보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는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우선순위를 매긴 대로 하루하루 일처리를 성공적으로 해내기가 정말 쉽지가 않았다. 이렇게 task를 잘 정의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자잘한 일들은 여전히 많았고, 가끔 아기를 아내 대신 봐 준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계획상의 일이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그게 미뤄져서 줄줄이 다른 일도 못하는 등 변수가 산적해 있었다. 게다가 막상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일에 집중을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경우도 여전히 자주 있었다. 정말 이게 가장 속상하다. 나는 왜 이토록 의지박약인 것일까??


내가 하려는 그 일에 동기부여가 충분하지 못해서 일이 하기 싫거나, 갑자기 하던 일이 도무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렵거나 해서 동기를 상실했을 때, 나는 높은 확률로 페이스북에 들어가거나 네이버 뉴스를 보면서 1시간 넘게 허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알았으면 고쳐야지. 그런데 참 생각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자, 이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주어지는 모든 일이 마냥 재미있지 않다. 동기를 부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심지어 자기최면 수준으로 생각을 고쳐야 될 때도 있다.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왜곡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애초에 내 성향이 그다지 낙천적이지는 않아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 스스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쏠 때가 자주 있다. 이 습관 역시 좋지 않으므로 고쳐야 하는데, 이것도 노력 부족인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문제가 되고 만다. 하지만 어쨌든 이 쳇바퀴를 탈출해야 한다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조금 더 자존감이 높아지고, 좀더 집행력이 좋아지고, 좀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어려움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과 집중력이 더해진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았겠지? 그러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나의 기도제목이다. 일 잘하는 사람 그 자체를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되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고 나서야 무엇이든 내 앞에 언젠가 주어지는 사명(calling)을 감당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아니, 멀리 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내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말씀대로 살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지금 멀티태스킹의 늪에서 쓸데없이 세월을 낭비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뭐,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지금 당장 연구실을 뛰쳐나와 다른 일을 시작하면 상황이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박사학위를 아직까지는 포기할 생각이 없으므로 결국 멀티태스킹을 최대한 생산적으로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힘내자, 노력하자. 싸우고 참아내고 이겨내고 극복하자. 제발.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Bryan_

,
반응형

연구를 할 때, 자꾸 이전에 읽었던 논문을 다시 가져와서 그 논문이 풀고자 했던 문제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해결했는지 새로 검토를 하고, 그렇게 내가 논문을 쓰려는 분야 논문들을 새로 살펴보는 경향이 나한테 있는 것 같다.


한번 읽을 때 정리를 잘 해뒀어야만 이런 revisit이 사라질까? 그냥 며칠 시간을 잡고 오로지 관련 연구들만 계속 읽어서 논문의 Related Work 섹션을 만들어 내야 하는 걸까?


보다 근본적으로, 자꾸만 내가 내 논문을 위해서 만들어낸 "문제 정의"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분명히 기존 연구 논문들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고려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 상황은 머릿속에서 이미 수 차례 검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그 방법론이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문제 정의가 제대로 안 된 것인지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내가 무언가를 제안할 때, 자꾸만 남들이 보기에 이정도는 되어야 쓸만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빨리 primary idea를 검증해야 할 때조차도 아주 길게 생각하고 아주 많은 상황을 동시에 고려해서 이를 수학적인 분석으로까지 만들어 내려는 내 욕심이 문제인 것 같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뭔가 결벽증 같은 것.


그래서 아이디어는 있고 문제 상황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내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아이디어를 검증할 시뮬레이션이나 실험은 천년만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지금 내 상황인 것 같다. ㅠㅠ


실험환경이 좀 문제가 있어도 좋으니, 선택과 집중을 해서 일단 문제의 핵심이 최소한으로 해결되는지부터 보기 위해서 먼저 간단하게 (자꾸 복잡해지지 말고!! ㅠㅠ) 코딩을 해서 결과부터 만들어 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번주에는 결벽증 성향을 마음 속 한켠에 봉인해 놓고, 빨리빨리 시뮬레이션 일처리를 진행하기 위해서 노력해 보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Bryan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