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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데이터를 뽑아야 해서 시뮬레이션 코드와 스크립트 파일들만 한동안 쳐다보고 살면, 어느 순간 자신감이 무지 많이 떨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거 다 이미 누군가 했던 것 아닐까?"

"이제서야 겨우 이 정도 결과가 나왔나? 한참 더 해야 되는 것 아닐까?"

대략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이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려면 논문을 읽어야 하는데,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기분이라면 참 좋겠지만 그런 종류의 읽기도 아니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울함이 극단에 치닫고 논문을 어떻게든 써야만 하는 궁지에 몰려서 다시 내 분야의 논문을 읽기 시작하면 점점 그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게 된다. 특히 잘 쓰여진 논문을 연속해서 여러 개를 읽고 나면 머릿속이 정돈되고 내 연구를 어떻게 구상할 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내 겉모습에서 아무런 달라진 점은 없다. ㅋㅋ)

그런데 잘 쓴 논문과 그렇지 않은 논문을 구분할 줄 알려면 일단 많이 읽어봐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는 듯.
유명한 학회/저널에 출판되었고, 많이 인용되었으며, 오래된 (기왕이면 해당 연구 분야의 초석을 놓은) 논문은, 마치 고전 문학을 읽는 기분이 들겠지만, 분명히 유용한 측면이 있다. 깨끗한 산 속에서 자란 인삼을 자연주의 방식으로 숙성해서 진하게 달여 낸 홍삼 진액 같은 느낌이 있다. 버릴 것이 전혀 없고 몸에 양분과 에너지를 공급하고 부작용이 없는 그런 느낌.


그나저나 빨리 저널 논문을 완성해야 하는데, 당장 글을 쓰는데 필요한 2018년도 논문부터 찾아서 읽고 정리를 시작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1995~2000년 언저리의 논문까지 다시 오고야 마는 나도 참 징하다. ㅜㅜ 내 연구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고 마치 모래 위에 쌓은 성 같은 허술한 기분은 여전히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쯤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는" 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단계가 되면 좋겠다. 결국 일관되고 꾸준한 노력으로 귀결된다.

그동안의 집중력 부족과 끈기 부족이 초래한 시간 낭비를 이번에는 꼭 메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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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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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에 대한 실험 코드를 고쳐 가며 새로 데이터를 뽑고, 또 문제가 있거나 개선할 부분이 보이면 다시 고치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유난히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어떤 설계(design)으로 개선해서 목적을 달성할 것인지 결정하는 단계이다.


예를 들어, 라우팅 프로토콜을 고치는 과정에서, source node가 자신이 트래픽을 보내기 위해서 먼저 경로를 탐색(route discovery)하고 선택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자주 하게 되면 그만큼 네트워크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러한 route discovery 자체를 줄이기 위해서 먼저 실제로 route discovery를 몇 번씩 했는지 파악을 할 필요가 생겼다. 이것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생각을 해 보았는데,

  1. 그냥 각 source node의 ID로 된 텍스트 파일을 만들고, 매 초마다 route discovery를 몇 번 했는지 숫자를 텍스트 파일에 시간 순서대로 한 줄씩 기록하는 방법
  2. Route discovery 전체를 기록하는 텍스트 파일 한 개를 만들고, 모든 source node가 같은 파일 포인터에 접근해서 시간, 노드ID, route discovery를 수행했다는 flag를 한 줄로 기록하는 방법

위의 두 가지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로 기록할 수 있어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통계를 내고 엑셀 파일 같은 곳에 가져다 쓸 것까지 생각을 해 봤을 때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은지 쉽게 판단이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이게 깔끔하게 마음 편한 방법으로 잘 정리가 되지 않자, 이것 때문에 하루 종일 다른 작업을 못하고 그냥 고민만 하고 딴짓만 하다가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사실은 내가 연구 측면에서 정의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고, 라우팅프로토콜의 성능을 측정하는 데 필요한 작은 통계 생성 방법일 뿐이고 어떤 설계를 따르던지 어차피 시뮬레이션 성능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무시하고 한 가지를 얼른 정해서 진행을 해도 되는 것이었는데, 어느 한 가지를 고르는 것이 속 시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연구 전체를 진행하지 못하고 마치 트랩에 걸리듯이 꼼짝하지 못했다.


결국 지금 밤이 되어서 그냥 첫 번째 방법으로 진행해서 얼른 경로 탐색에 대한 기록부터 만들어내고, 그렇게 각 source node별로 만들어진 기록을 합산하는 스크립트를 파이썬으로 빨리 만들어서 붙이기로 했다. 사실 이미 각 노드마다 flow 트래픽 사용량에 대한 통계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내고 똑같이 파이썬 코드로 후처리(post-processing)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코드를 재활용해서 가장 적은 시간을 들여서 통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지저분하게 파일 개수가 많아지는 것, ns-3 코드 상에서 파일 포인터가 많아지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기도 하고...)


나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 단점이므로, 그냥 가급적이면 조금 더 빨리 결정한 다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밀어붙인 뒤에 나중에 문제가 터지면 그것을 그 시점에서 재빨리 고쳐 나가서 목적부터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의 것으로 충분하다 (마태복음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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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구하는 무선 네트워크, 메쉬 네트워크, 오버레이 네트워크, Quality-of-Service (QoS), 라우팅(Routing), 엣지 컴퓨팅(Edge Computing) 등의 분야에서 내로라 하는 대단한 연구자들이 좋은 학회와 저널에 내는 논문들을 보면, 마치 명작 고전 문학 작품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 대단한 연구자들(일반적으로 대부분이 교수들)의 이름이 들어간 모든 논문이 다 명작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엄청나게 다작(多作)을 하는 중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쓴 몇몇 논문들은 누가 봐도 내용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고, 이해하기 좋은 문장으로 쓰여져 있으면서도 내용에 깊이가 있다.


논문들 중에 간혹 맨 뒤에 저자의 약력(bio)이 한두 문단씩 첨부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 굳이 저자들의 약력을 일부러 읽지는 않지만, 오늘은 잘 쓰여진 좋은 저널의 저자들(그래봤자 두 명이다)의 약력을 그냥 훑어보았다.


첫번째 저자는 박사과정 학생인데 중국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상태였다 (출판 연도로 봤을 때 지금은 이미 박사가 되었을 것이다). 두번째 저자는 지도교수인데, 인도계 미국인으로 학부, 석사, 박사를 모두 미국에서 했고, 그 뒤에 미국의 여러 주립 대학교에서 방문 연구원(아마도 포닥 PostDoc.)으로 있었다. 포닥뿐만 아니라 1990년대~2000년대 초반 사이에 인텔, 파나소닉, HP, EMC 등의 회사에서도 일했었다. (지금은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회사의 위상이 워낙 강하지만, 1990년대~2000년대만 해도 인텔, HP 같은 회사들이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갖는 위상이 상당했다. 지금도 연구 쪽에서는 아직 활발하기도 하고...) 아마 그 뒤에 교수가 된 듯 한데, 교수가 되고 나서는 top level 저널 여러 개의 에디터와 S급 국제학회의 세션 장과 리뷰어 등을 맡고 있다.


사실 다른 대부분의 잘 쓰여진 논문들도 논문 끝에 적혀 있는 저자 약력을 보면, 대부분이 위와 비슷하다.

내가 지금 내 연구를 느릿느릿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좋은 논문을 써 내는 미국대학의 교수들은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열심히 자기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신기하고 부럽다. 단 1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만, 아니 그렇게 살아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 엄청난 분량의 성과를, 그것도 질적으로도 우수한 성과를 척척 달성해 내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마치 처음부터 연구와 관련된 능력을 타고난 인간들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잘 갖춰진 교육의 힘으로 전인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한 사람들 중에서 어느 정도 지능이 더해짐으로써 위와 같은 능력자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부각되는 영재성을 비롯해서 선천적인 요소도 분명히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러한 원석을 잘 키워내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우수한 연구자로 다듬어지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저렇게 십수 년 동안 지치지 않고, 매너리즘에도 빠지지 않고 일관되게 자신의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top level의 연구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이다. 사실 연구 그 자체를 수행하는 데에는 비상한 머리도 도움이 되지만, 기존 연구들을 찾아보고 정리하고 분석해서 거기서 약간의 개선을 만들어 내는 꾸준한 노력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여기에 공동 저자들의 분업이 잘 되면 금상첨화)

나는 가끔 내 연구가 정말 쳐다도 보기 싫을 때가 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흥미가 생겨서 열심히 이것저것 찾아보고 글로 정리도 하는 등 마치 감정의 변화에 따라 생산성도 같이 따라 움직이는 듯한 취약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가령 일주일의 시간을 투입해도 생산성이 천차만별인 경우가 많다.


사실 속으로 잘 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그게 결과만 취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아닌가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좋은 논문의 뒤에 약력이 적힌 그런 멋진 연구자가 지금 당장 "되고는" 싶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쌓아 올려야 할 노력과 훈련은 싫어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내 천성이 게으르고 노력을 투입해야 할 때의 인내심이 부족한 것이다. 이러한 게으름을 극복하고 인내심을 유지하려면 뼈를 깎는 심정으로 훈련을 하거나, 나의 동기 부여가 게으름을 뛰어넘어야만 한다. 아마 둘 다 병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면 그걸 지속적으로 고민하면서 이리 찔러보고 저리 찔러보며 해결책을 찾아내는 노력을 하는 대신, 그 고민을 회피하고 잠깐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포털 사이트와 SNS를 헤매게 된다. 그래서 하루 종일, 때로는 며칠에 걸쳐서 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해결해야 되는 그 연구, 그 문제가 정말로 내가 성취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쉬지 않고 계속 파고들었을 것이다. 롤플레잉 게임을 하면서 아직 잡지 못하는 보스 몬스터를 꼭 내 손으로 잡아야겠다는 목표의식이 생기면 무서운 속도로 인내심을 갖고 레벨업을 할 수 있는데, 그런 목표를 상실하면 레벨업을 할 생각은 들지 않고 그저 내가 때려잡기 쉬운 잡몹(잡 몬스터)을 잡으며 채워지지 않는 아주 작은 양의 행복으로 공허한 마음을 계속 채우려고만 든다.


나의 목표의식은 무엇인가?

진짜 질 좋은 논문을 쓰는 우수한 연구자가 되고 싶은 것이 맞나?

솔직히 진짜 그런 사람보다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면서 주변에 존재하는 소소한 소비거리만을 소비하면 그저 좋다고 생각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맞는 것 같다.)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5일 만에 논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다 새로 뒤집어 엎어서 쓸 수도 있으면서, 몇 달, 아니 실제로 실험을 시작한 것으로 따지면 일 년이 다 되도록 논문을 써내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내가 동기 부여를 상실한 것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왜 욕심이 없는 것인가?

잘 되고 싶고, 인정받고 싶지 않은 것인가?

왜 스스로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인생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일까?

더 큰 목표와 더 큰 행복을 위해, 지금 당장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피해서 포털 사이트와 SNS에서 아주 작은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의 흐름을 끊자. 그리고 더 나은 나를 상상하며, 하나씩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기쁨을 습관으로 만들자.

나는 충분히 내가 맡은 연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 자신을 믿고, (+나에게 근본적인 지혜와 힘을 주시는 전능자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믿고) 지금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를 향해 breakthrough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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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나이키 광고 "Just Do It".

영상 링크: https://youtu.be/3Dl1hilzm84







벌써 이 광고가 나온 지가 7년이 넘었다.

사실 연구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 모든 것이 결정되는 올림픽 대회에 비하면 완성할 때까지 훨씬 기회도 많고 안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매 순간의 연구를 지속하는 행위에 있어서 지나치게 걱정이 많아서 생산성을 너무 많이 떨어뜨리는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


사실 연구 결과물로써의 '논문'이 나올 때까지 나는 얼마든지 글을 고쳐쓸 수 있고, 실험과 시뮬레이션은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서 돌리면 된다. 만약 due date가 고정되어 있다면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고치는 양에 한계가 있겠지만, 적어도 단 한 번만에 일필휘지로 논문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단 한 번만에 제대로 돌아가는 실험 코드를 만들려고 하고, 단 한번의 생각으로 논문의 한 섹션을 논리적인 빈틈 없이 쭉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무리한 단기 목표 때문에, 최종 목표인 논문의 완성까지 도달하는 길이 실제로 겪는 것보다 훨씬 더 험난해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당연히 괜히 심리적으로 더 지칠 뿐이다. 이것은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니다.


이런 잘못된 심리적인 덫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다.

CF에서 보듯이, 일단 아주 간단한 것부터 달려들어서 그냥 한번 고쳐 보는 것.

단지 변수 하나를 추가하거나 바꾸는 정도의 아주 간단한 코드 조각을 일단 만들고 보는 것.

일단 한국어로라도 간단하게, 비어 있는 논문 페이지에 "여기에 무슨 내용이 들어간다, 이런 것으로 채운다"라고 뭐든지 써 보는 것.


아무 것도 안하기 때문에 그 대신 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의 흐름들을 일단 뭔가 간단한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점점 지워 나가고, 연구와 관련된 생각의 흐름들로 자연스럽게 채워 나가는 이 작은 용기가 나에게 필요하다.


Just make something,

just write something,

just start making something.


일단 뭐든 간단히 만들고 고치자.

Divide and conq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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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 특히 이공계 대학원생에게 연구노트는 정말 중요하다. 연구노트를 그 목적대로 작성을 했을 경우, 연구의 진행 상황에 대한 기록이 모두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매일매일 연구를 올바른 방향으로 진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실험 같은 것이 실패를 하더라도 그 기록이 모두 남으니까 어떤 형태로든 자산이 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은 종이로 된 연구노트 책자를 쓰겠지만,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오직 PC 화면만 쳐다보면서 하는 입장에서 전자연구노트도 쓸만하다. 하지만 학교에서 제공하는 전자연구노트는 파일을 직접 업로드하는 방식이라서 내가 다른 프로그램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아니면 그냥 메모장, 또는 이미지 등)을 사용해서 일단 만들어야 한다.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실험 통계는 엑셀 파일, 랩세미나 발표를 하거나 교수님과의 의견 교환을 위해서 만든 슬라이드는 파워포인트 파일, 문서는 워드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내가 점점 MS 오피스 프로그램을 써서 직접 파일을 만드는 경우는 줄어들고, 그냥 웹 브라우저에서 구글 드라이브에 접속해서 문서/스프레드시트/프레젠테이션을 바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워드/엑셀/파워포인트만 가지고 논문 한 편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게 옛날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은 작업을 웹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평소에 각종 개발이나 실험을 리눅스 환경에서만 하다 보니 그냥 아예 main PC를 리눅스로 쓰다 보니, 윈도우에 대한 접근성이 조금 떨어져서 더더욱 MS 오피스를 쓰지 않게 된 측면도 있다.


논문 작성은 Overleaf를 써서 tex를 웹 상에서 직접 고치고, 공동저자들에게 링크를 줘서 바로 확인하거나 서로 동시에 고치면 된다. 예전에는 tex를 쓰려면 프로그램을 별도로 써야 했지만, 웹 기반으로 하면서 훨씬 편해졌다. 게다가 MS 워드를 가지고 논문을 작성하면 예기치 않게 문서 레이아웃이 망가지거나 그림이 서로 겹치는 등 온갖 불편한 일이 생기는 데 비해, tex는 문법만 잘 알고 있으면 문서 레이아웃 망가질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으니 훨씬 좋다.

기본 아이디어에 대한 brainstorming 같은 일도 구글 문서나 구글 프레젠테이션에서 간단하게 만들어서 이것을 또한 링크로 공유해서 수정하면 된다. 이 단계에서는 MS 오피스가 제공하는 강력한 기능들까지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흰 바탕에 꾸밀 필요가 없는 검정색 텍스트와 간단한 도형 그림 정도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구글 스프레드시트는 아직까지는 MS 엑셀에 비해 기능과 편의성이 많이 부족해서 이 부분은 아쉽다.


그리고 기존에 PC에서 MS 오피스를 써서 작업할 때에는 항상 예상치 못한 PC의 다운이나 하드디스크 고장으로 인해 파일이 망가지고 사라지는 등의 위험 요소를 안고 가야 했는데, 요즘은 웹 기반으로 하다 보니 그런 걱정이 거의 사라졌다.

물론 순수하게 개인 PC에서만 모든 작업을 다 하던 시절과 지금의 완전한 웹 기반 환경 사이에 드롭박스(dropbox)를 활용해서 과거 저장 내역을 기억하고 만약의 사태에 파일을 복구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dropbox는 여러 학생들이 참여하는 연구과제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문서들을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지금도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을 hwp 파일들을 관리하려면 뭐..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hwp 파일만큼은 아직도 구글문서처럼 웹 기반으로 협업이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 혼자 또는 나와 지도교수, 공동저자 학생 한두 명이 같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논문을 쓰는 상황에서는 굳이 dropbox도 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실험이나 시뮬레이션을 하다 보면 결국 윈도우보다는 리눅스/맥이 더 편할 수밖에 없고, 윈도우 PC보다 리눅스/맥을 더 자주 활용하는 입장에서 구글 드라이브의 접근성이 MS 오피스에 비하면 훨씬 좋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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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를 종합해서, 서면연구노트는 거의 쓰지 않고, 전자연구노트는 연구과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기적으로 만들어지는 회의록, 발표자료, 보고서 파일들을 업로드하는 요도로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전자연구노트를 개인연구에 잘 쓰지 않다 보니까 내 개인연구의 모든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이를 기반으로 연구를 차분하게 진행시켜 나가기 위한 기록 매체가 마땅치 않게 되었다.


순수하게 내 개인연구 진행 상황을 매일매일 잘 기록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간에 다른 일을 하다가 돌아오거나, 그 다음날에 다시 시작하더라도 기억을 더듬는 시간을 최소화시킬 만한 환경이 필요했다. 사실 이런 목적을 충족해 주는 도구는 이미 널리고 널렸지만, 왠지 모르게 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이 분야에서 단연 에버노트가 막강하겠지만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논문들을 잘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멘델레이(Mendeley)가 좋은 도구가 되겠지만 논문 이외의 문서들 관리하기는 힘들다. 트렐로(tello)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task를 분류하고 todo list를 관리하기에 좋아 보였지만, 여기에 코딩하면서 발생한 버그, 해결 방법, 논문 아이디어, 시뮬레이션 환경 등등 이것저것 다 기록하다 보니 오히려 너무 기록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서(카드의 제목, 카드의 description, 카드 내부의 댓글, 카드에 추가할 수 있는 checklist, 거기에 카드 종류를 구분할 수 있는 custom label 등등...) 나만의 기준을 일일이 만들지 않으면 너무 중구난방으로 기록되는 바람에 나중에 오히려 찾아보기가 불편한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일처리를 끝내면 보관(archive) 처리를 해서 사라지게 되는데, 그렇게 화면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남아 있기도 해야 하고, 그렇게 카드 수와 카테고리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자 오히려 관리하기 어려웠다. 트렐로가 이 모양이니 이와 유사한 Todo 관련 앱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슬랙(slack)은 공동저자들과 협업을 하면서 발생한 대화 내용과 모든 파일이 다 시간순으로 기록으로 남아 있고 검색해서 찾아보기도 편했지만, 메신저의 대화창 자체를 기록을 저장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은 너무 무리였다. (게다가 대화 개수가 10,000개를 넘어가면 그보다 과거의 내용은 돈을 내지 않으면 볼 수도 없다.)


위의 여러 가지 서비스들을 다 시도해 보는 과정에서, 모두 어느 정도 써 보다가 다 중단되었지만, 그러한 시도를 하는 동안에 병행해서 계속 기록을 남기던 가장 원초적인 수단은 결국 메모장(...)이었다.

그 어떤 서식도 넣을 수 없었지만, 그 안에서 내가 나만의 indent를 가지고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기록을 남기고, 파일 이름은 날짜와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예: 180117_routing_table_update_issue.txt), 그 파일들을 dropbox 폴더에 모아 놓는 이 원시적인 작업만을 내가 멈추지 않고 해 오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강력한 도구보다는 불필요한 것이나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접근성이 좋은, 미니멀리즘 비슷한 것을 원했던 것일까?


결국 위와 같은 고민을 거쳐서 지금은 구글 드라이브에 폴더 하나를 통째로 모든 공동연구자들과 공유하고, 그 아래에 워드 문서를 큼지막한 이슈 별로 만들고, 그 문서 안에서 매일매일의 날짜마다 새 페이지를 만들어서 그날 겪은 문제와 그 전날의 문제를 해결한 내역, 앞으로 할 일 등을 그저 텍스트로 작성하고, 해결이 안된 부분은 빨간 글씨, 해결 완료한 부분은 파란 글씨로 표시하는 최소한의 서식만 남겨 둔 채 사용을 해 보았더니, 현재로써는 이게 가장 생산성이 좋다.


사실 '서투른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는 속담도 떠오르고, 연구가 정말 절실하거나 교수님께서 나를 더 많이 쪼시거나(...) 하시면 도구 따위가 문제가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내가 쓰기 편하고, 내 손에 잘 익으면 그만큼 마음의 거리낌이 줄어드는 만큼 연구에 집중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최근 5일 동안은 위와 같은 시도의 끝에 정착한 구글 드라이브와 최소한의 서식이 꽤 좋은 생산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니까.


좀더 일찍 이런 손에 잘 익는 도구에 대한 고민을 했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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