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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졸업이 되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절정에 달할 때쯤, 박사학위 디펜스를 마쳤다. 물론 박사학위논문심사는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날리는 수준으로 탈탈 털렸다. 애초에 커미티(committee) 구성이 국내 무선 네트워킹 분야에서 어벤저스 정도는 될 만한 교수님들을 모셨기에,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분들 앞에서 그분들의 중요한 시간을 빼앗아 가면서 참 부끄러운 연구를 내놓고서 디펜스를 한 것 같아서 죄송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교수님들로부터 나의 후속 연구가 어느 부분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의견을 받을 수 있었기에 감사했다. 그만큼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것에 희망을 둬야겠다.

디펜스 직후에는 사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고, 학위수여식 날짜가 지나고 나서야 졸업을 했다는 것이 좀 실감이 났다. 이제는 나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이끌어 주는 '대학'이라는 무형의 존재가 나를 더이상 껴안아 주는 게 아니고, 나는 이제 그 품을 벗어나야 한다. 학생이라는 신분 덕분에 내 인생의 '자기주도적 설계'에 대한 고민을 미뤄둘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미뤄둘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졸업식을 영어로 commencement (시작)라고 부르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내가 온전히 주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박사과정 중간에는 거의 매년 힘들 때마다, 학교를 벗어나면 연구는 절대로 쳐다보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지만, 역설적으로 향후 진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연구 쪽으로 계속 이어나가는 옵션이 나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게 싫지도 않다. 오히려 연구를 계속 해보는 게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내 성격도 그렇고 나를 잘 알고 있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일관된 평가가 있었는데,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애써 부인해 왔다. '어딜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우리 연구실보다는 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무한경쟁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재미있는' 산업계에 발을 들여놓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상황에서 고민을 하면 할 수록 빠른 변화에 맞추어 재미있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연구계에 발을 들여놓아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줏대없는 인간이라고 나 자신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더이상 자존감을 낮출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어디일까?' 이 생각이 이끄는 대로, 그리고 세상에서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기회를 잘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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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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