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
아내가 임신 8개월에 자궁 수축 가능성 때문에 10일 가량 산부인과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음 며칠 간은 내가 휴가를 내고 8살 딸아이와 둘이 집을 지키다가, 그 뒤에 휴가를 계속 쓸 수는 없어서 장모님이 오셔서 일주일 간 딸아이 등/하교와 식사를 챙겨 주셨다.
그 와중에 딸아이는 원래 체질적으로 호흡기가 약해서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비염이 심해졌고, 병원에 정기적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 코로나19 아님).
오늘도 병원에 가서 코, 목, 폐를 살펴보고 약을 새로 처방받아야 해서, 내가 먼저 소아과에 가서 진료 예약을 하고 돌아왔다. 대기 인수가 꽤 돼서 1시간 뒤에 다시 나가면 되었고, 40분쯤 지나서 딸아이에게 병원에 가기 위해 옷을 입으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는 내복 차림에 가디건 상의만 하나 걸치고 나가겠다고 한다. 40분 전에 병원 진료예약하러 혼자 나갔을 때 바깥 공기가 의외로 쌀쌀해서, 나는 아이에게 추우니까 위/아래 활동복(어린이 트레이닝복) 혹은 평소 등교 때 입는 라운드 티와 바지를 입으라고 했다. 그런데 싫다고 한다. 그걸 지켜보던 장모님께서도 거들기 시작하셨다. 추우니까 입어야 한다, 그렇게 내복 차림으로만 나가면 부끄럽고 안된다 등등 잔소리를 하셨다.
*나의 역린을 건드린 아이
그러자 아이는 장모님의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표현을 온 몸으로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양 손으로 귀를 막는 행동을 취하고, 장모님을 곁눈질로 노려보더니, 급기야 자기 방에 드러누워 버렸다. 나는 옷을 입고 나올 거라 예상하고 현관문 앞에 벌써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5분 넘게 나오지를 않는 아이에게 들릴 수 있는 목소리로 "얼른 가자! 진료 순서 다 돼가!"라고 말했다.
결국 내가 아이 방에 들어가서 데리고 나와야겠다 싶어서 방에 가 보니, 여전히 내복 차림에 활동복은 내팽겨쳐져 있고, 방금 전에 분명히 걸치고 있던 가디건도 다시 벗어던져 놓았다. 양말도 아직 신지 않았고, 그 상태로 아직도 방에 드러누워 있었다.
"얼른 가야해!" 라고 소리치는 나를 보고 그제서야 일어나서 양말을 챙긴다. 하지만 트레이닝복은 여전히 입기 싫은가 보다. (※주: 이 옷은 아이가 평소에 외출할 때 즐겨 입는 옷이라서, 옷 자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다.) 옆에서 한번 더 장모님께서 잔소리를 시전하시고, 결국 트레이닝복과 외투는 내가 직접 집어 들고 나왔다.
"빨리 나와!!"
내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고, 그제서야 내 분노 레벨이 높아진 것을 인지한 딸아이가 양말을 주워 신기 시작한다. 나도 이미 화가 나서 양말을 신고 있는 아이를 다그쳤다. 빨리 신으라고, 늦었다고.
한시간 뒤에 병원에 다시 가야 하는데 70분이 넘어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나는 현관문을 쾅 닫았고, 여전히 내복 차림인 아이는 나한테서 외투만 뺏어서는 입었다. 평소에 외출할 때는 그렇게 자기가 입고 싶은 공주 옷이나 화려한 옷을 챙겨 입겠다는 아이가, 지금은 잠옷에 부스스한 머리 그대로 외투만 걸치고 나서는 상황도 어이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진료 예약해 둔 시간과 진료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를 벗어난 상황에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빨리 따라와!!"
집을 나서서 병원에 갈 때까지 한 마디도 안하고 내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고, 아이는 눈치를 보면서 내 보폭을 빠른 잰걸음으로 뒤따라 왔다. 병원에 도착하니 역시나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해서 우리의 진료 순서가 다시 맨 끝으로 가 있었다. 한시간 10분 전에 내가 혼자 진료예약을 할 때 우리딸의 진료 순서가 16번째였는데, 지금 다시 가서 확인하니 새로 16번째로 되어 있고, 우리 아이 이름이 진료 순서 모니터에서 보이는 제일 마지막 이름이었다.
결국 나는 병원에 다른 부모와 아이들, 간호사와 사무원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아이를 노려보며 크게 소리치듯 말했다.
"너 때문에 늦었잖아! 옷 안입겠다고 난리 쳐서 바로 진료받을 수도 있는걸 지금 다시 순서가 꼴찌잖아! 한시간 더 기다려야 돼!!"
간호사가 멋쩍게 웃으며 우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보고 계시고, 주위 아이들도 핸드폰과 TV 애니메이션을 보다 말고 내 얼굴을 쳐다 보고, 엄마들도 나를 보고, 심지어 울던 아이도 잠깐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병원 밖 인도에 아이를 세워 놓고 한층 더 큰 목소리로 혼내기 시작했다. 병원 진료 후에 슈퍼마켓에서 장도 봐야 하는데 너 때문에 늦었다는 종류의 얘기를 큰 목소리와 씩씩거리는 표정, 나의 과장된 제스처에 발을 쿵쿵 구르는 행동과 함께 쏟아 부었다. 이내 딸아이는 울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병원에 있던 아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일이냐고. 전화상으로 또 방금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얘기해 주었다. 대신 그 얘기를 아주 흥분된 어조로, 씩씩거리며 빠른 속도로 내뱉었다. 우리는 분명 병원 밖에 있었지만, 아마 얇은 유리벽과 유리문을 뚫고 목소리가 다 들렸을 것이다.
한시간 정도를 더 기다리기 위해서 바로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갔다. 나는 이미 온 몸으로 화를 표현하며 자리에 앉았고, 비어 있는 장바구니를 쿵 내려놓고, 핸드폰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놓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우리 테이블과 가까운 곳에 앉은 어른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나를 한번 쳐다보며 한 5초 정도 정적이 흐르다가, 이내 다시 수다를 이어 가셨다. 아이는 내 건너편 의자에 마주 앉아서 내 눈치를 보며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고, 그렇게 20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병원에서 앞선 환자들의 진료 시간이 길어져서 잠깐 기다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딸아이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태블릿도 미리 챙겨서 나왔지만, 집에서부터 시작된 이 답답한 상황과 내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 때문에 일부러 태블릿을 꺼내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 세 모금에 다 들이키며 열기를 낮추고, 딸아이를 우두커니 내버려 두고 혼자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하나같이 성질을 돋구는 것들 뿐이라 역효과가 나서 다시 핸드폰을 던지듯 테이블에 두고, 이미 거의 얼음물과 다를 바 없는 아메리카노만 마시며 말 없이 카페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아내로부터 다시 걸려 오는 전화...
병원에서 우리 진료 순서를 앞으로 당겨 주었으니 10분 안에 다시 병원에 가 보라고 한다. 병원에는 원래 아내가 매번 데리고 갔던 터라 병원에는 아이의 이름으로 아내의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어서, 아내가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다. 방금 아이가 아주 많이 혼나고 있었던 것 같아서 너무 안돼 보여서 순서를 바꾸어 주었다고... 내가 대놓고 소리치듯 화를 내고 다그쳤으니, 심지어 도로 건너편에 지나가는 사람이 봤었어도 심하게 혼나는 줄은 알았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부끄러워하고 민망해야 정상인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내가 아이에게 평소에 거의 화를 안내는데,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라도 크게 혼내서 정신적 충격(?)으로 행동이 달라지면 어떨까?'
당연히 미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 안의 다른 인격이 알아채고 '그건 미친 거다'라고 경고를 보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내가 대학원에서 혼나던 방식
항상 나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일부러 아주 빡세기로 소문난 연구실에 제 발로 걸어들어가서 맞닥뜨린 랩미팅... 선배들이 밤새도록 조사/분석하고 공들여 만든 슬라이드 십여 장에서 맨 첫번째 제목 페이지에서부터 지도교수의 지적이 시작되었다. 제대로 조사했으면 저런 아메바같은 생각으로 쓴 제목이 나왔겠냐며.
그 뒤로 두어 장 더 발표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결국 두번째 장에서 다시 신랄한 비난이 속사포처럼 회의실에 쏟아졌고, 맨 마지막에 지도교수는 위로를 한답시고 이렇게 말했다. "OO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 지난번 OOOO 내용 발표 때는 잘해놓고, 이번에는 왜 그랬나? 그건 학부생이 수업시간에 만든 프로젝트밖에 안 되고 이건 세계 탑급 연구다 등등..."
격려와 인격을 지긋이 밟아주는 것의 경계가 모호한 그 랩미팅을 대략 5~6년 정도 들었던 것 같다. 석사 1년차 때에는 위의 모든 선배들이 다 짓밟혔고, 2년차가 되고 나서는 내가 매주 타겟이 되었으며, 박사과정 때에도 대형 프로젝트 하나를 맡아서 하는 동안 웬만한 종류의 지적은 다 들었던 것 같다. 선배들처럼 아메바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초등학생은 자주 되었고, 학부생 2학년으로는 수백 번 돌아갔다 왔으며, 박사과정 중에도 석사1년차로 수십 번 돌아갔었다.
이 지독한 지도를 받으면서도 남들에게 욕 한번 시원하게 하지 않고 항상 배려를 우선하며 살았다. 이렇게 지적당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독인지 알았다면, 진작에 지도교수를 갈아치웠을 테지만, 나도 너무 익숙해져 버리고 지도교수는 중간에 테뉴어 심사(종신직)를 통과하고 점점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지적의 강도가 약해지셔서 연구실이 지낼 만하게 되고 말았다. 마치 독극물을 가까이 두고도 죽지는 않으니까 계속 같이 살아가며 점차 인격이 악에 받친 비난에 중독되고 변질되는 것과 같았다.
*내가 끊어내야 한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집중된다. 안타깝지만, 정말 싫지만, 내가 변해야 한다. 사실 평상시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나는 임계치를 넘어가기 전까지는 한없이 다정하고 착하고 다 들어주고 놀아주는 아빠의 모습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계치가 넘어서는 순간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임계치 = a*(나와 아내의 말을 반복해서 무시할 때) + (1-a){(웃어른-딸아이의 할아버지/할머니 등-의 말을 반복해서 무시할 때) + (바깥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a는 0과 1 사이이고, 현재 0.1로 세팅되어 있다.
아이가 한없이 만만한 내 말을 무시할 수도 있고, 엄마 말을 무시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할머니/외할아버지/외할머니가 여러 번 부탁하는 데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거나 기분 나쁠 정도로 거부를 하는 경우에, 혹은 집 밖에서 예의를 갖춰야 하는데 완전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난리를 치면, 나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정신줄을 놓게 된다.
그 순간 아이를 강한 힘으로 잡아끌어서 둘만 있을 수 있는 장소로 가서, 번개처럼 노려보며 우박처럼 아이가 저지른 나쁜 행동을 하나씩 지적한다. (말이 이렇지 사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시선에서는 내가 하나도 안 무서워 보인다고 한다. =_=;; ) 하지만 그래도 아이한테 효과는 있어서, 대부분 아이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지기는 했다.
아내가 지적하는 것은 내가 화내기 전 상태를 0으로 보고, 화가 많이 난 상태를 100으로 본다면, 한참 동안 계속 0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100이 되면서 크게 폭발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대응할 새도 없이 아이는 놀라고, 자기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는 것보다는 갑자기 폭발해 버린 내가 무서워서 울지만 최종적인 행동 교정으로 이어지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내 감정을 다 쏟아붓는 것처럼 보인다고...
*부모님(아이의 할아버지/할머니)의 방식
최근 고향에서 부모님이 집에 오셔서 아내 대신 며칠 간 아이를 봐주시기로 하셨는데, 놀랍게도 아이가 하루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협조적(?)인 태도가 늘어난 것이 느껴졌다.
부모님도 유별난 딸아이 때문에 혀를 냅두르시기는 했지만, 의외로 단순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계셨다. 그것은 아이가 잘못한 행동/발언에 대해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그건 잘못된 거야. 그러면 할머니가 너무 속상해. 그건 이러이런 식으로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참 기쁠것 같아~"라고 그저 아이 옆에서 반복적으로 말하시며 듣기 싫은 아이가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치 뛰어난 미사여구나 철저한 철학적 논리 대신 그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올바른지, 올바른 행동이 얼마나 착하고 예쁜지를 지속적으로 옆에서 얘기해 주는 것이 학습효과가 되어 실제로 아이의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계셨다.
그 과정에서 작은 팁도 하나 있었는데, 아침에 자는 아이를 깨울 때 "10분만 더 잘께요"라고 하면 알겠다고 해놓고는 1~2분 뒤에 가서 "10분 지났다~ 지금 O시 O분이야"라고 말씀하시면 10분 더 잔 줄 알고 일어난다고 한다. =_=;;;;;; 아직은 시간 개념과 시계의 분침을 정확히 못 봐서 가능한 수법인 듯...
내가 비록 연구실에서 정신적으로 독극물을 흡수하며 나쁜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아이에게 분노를 뜬금없이 표출하지는 않도록, 그보다는 명확한 메세지(옳다/그르다)를 단호하게 반복해서 전달하고, 이후에는 과감하게 집행(e.g. 세번 말 안들으면 밥을 치워 버린다고 약속했다면 진짜로 밥을 치워 버리기)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