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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두서없이 쓴 일기입니다.


가끔 육아와 가장의 짐을 짊어진 채 여전히 불투명한 박사학위를 앞두고 부족한 시간을 두고 싸우는 내가 처량할 때가 있다.

아무도 내 고민을 자세하게 모르는 것 같다. 실험은 실험대로 잘 안되고, 하루라도 빨리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신경쓸 것은 너무 많고, 연구에 최고의 집중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지만, 온갖 잡다한 일처리들 다 하고 나면 내게 주어지는 '자원'은 이미 체력을 소진한 육체와 늦은 저녁시간밖에 없다. 그 때가 되어서야 겨우겨우 집에서 도망치듯이 나와서 연구실에 와서 실험이든 논문 작성이든 시작할 수 있다. 이미 그런 늦은 시간에 와 봐야 졸리기 시작하고 집중도 잘 안되고, 기껏 주어지는 시간에도 제대로 실험 진행이 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시간은 시간대로 허비하고, 그렇다고 일처리 제대로 되지도 못한 채 그냥 잠을 자려니 그냥 허비해 버린 하루가 너무 아까워서 잠을 자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뭔가 조금이라도 해둬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쓸모없이 새벽을 맞이한다. 말 그대로, 진심으로 내 인생이 속상하다.


집에 PC를 잘 설정해 놓고 듀얼모니터까지 갖췄지만 아무 소용없다.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이상 꾸준히 집중해야 뭐가 됐든 진행이 되는 연구인데 그럴 수가 없는 환경인 건 너무 당연하다. 정말 예쁘고 귀여운 딸이지만, 잠들기 전까지 딸과 놀아주고 밥 먹여주고 씻겨 주고 어지럽혀진 집안 정리를 해야 하는데, 아내가 그 뒤치다꺼리를 대부분 맡아 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옆에서 그 정신없는 집안에서 혼자 연구한다고 PC 앞에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뭘 도와줘도 도와줘야 안심이 되고, 실제로도 딸아이가 나한테 계속 오니까 수시로 봐줘야 한다.

이러니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하지만, 정말로 실험이든 연구든 진행을 시키려면 주말에 모처럼 시간이 주어졌을 때 독하게 마음먹고 집을 박차고 나와야만 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렇게 안할 수가 없다. 가정적인 남자? 당연히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졸업도 못했고 영영 졸업 못할 위기에 놓인 내가 가정적인 남자가 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에게는 엄청난 사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토요일 하루 정도를 정말 독하게 마음 먹고 가정에서 가정적인 남자로 '희생'해야만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말 그대로 그냥 하루가 없어진다. 그 하루 동안에 연 5억짜리 정부 과제의 연차보고서 한 편을 끝낼 수 있고, 관련연구 논문 10편 정도를 발췌 형식으로 읽을 수 있고, 실험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모듈 하나 정도의 기능과 버그는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가장 좋은 컨디션과 집중력을 모두 아기에게 쏟아부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가 되고 싶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졸업요건을 맞출 수 있는 논문을 내야 되는 상황에서 하루를 온전히 소비하는 것은 나한테는 시간낭비이고, 우리 가족 전체의 불확실성과 고생을 향해서 한 발짝씩 더 전진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가정적인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매일매일 이런 갈등이 단 한 번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것부터 생각하자면,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육아를 할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도 아내도 너무 순진했다. 아기는 혼자서 그냥 잘 클 줄 알았지만, 나 또는 아내의 모든 시간을 다 쏟아붓는 것이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게다가 돈도 이렇게나 많이 들 줄도 몰랐다. 매달 적자가 나다가 가끔 들어오는 대학원생 세금 환급이나 장려금 같은 걸로 겨우 카드값을 메꾸고, 그 다음 달 부터 또다시 적자가 시작된다.


이래서 인생에서 타이밍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제때 졸업했어야 하고, 제때 노력했어야 하고, 제때 인생의 각종 선택이 주는 결과와 의미들을 깨달았어야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게 대략 2년씩 늦어졌다. 지금의 졸업에 대한 고민을 2년만 더 일찍 심각하게 시작했더라면 내가 이토록 고민에 휩싸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왜 이리도 느리고 능력이 부족한 것일까? 정말 속상하고 답답하다. 더 똑똑하고 더 이해속도와 코딩 속도도 빠르고 영어도 더 잘 하고 싶다. 남의 논문은 잘 봐주고, 정부과제 정도는 이제 손쉽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 개인연구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정말 동기부여가 약해지고, 하기도 싫어지고, 잘 진행도 안되고, 어렵기까지 하다. 정말 속된 말로 거지같다.


단 하루라도 가족과 함께 놀기만 하느라 연구실에 나가지 못하거나 컴퓨터를 쓰지 못하면 불안해지는 내 감정 상태를 놓고 보면 워커홀릭인데, 정작 또 연구실에 가서 일을 하려고 하면 쉽사리 진행하지 못하는, ADHD 같은 증상을 겪기도 한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제발 이 거지같은 굴레를 벗어나고 싶다.


연구실에서 정부 과제 제안서 작성, 과제 실무책임 역할만 지나치게 강화한 것 같은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내 졸업연구 주제와 관련은 없지만 주제 그 자체로 놓고 보면 트렌디하고 중요한 편에 속하는 과제를 맡아서 운영했었는데, 내 핵심 실력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부수적인 실력들만 키우는 것 같아서 아주 속상하다. 이런 멀티플레이어 따위 되어서 어디다 쓸 지 회의감만 들 뿐. 지금 배운 이 역량이 쓰일 만한 시기도 대략 10~20년 뒤일 것 같은데 내 핵심 역량을 키워야 할 시간에 리더쉽 역량이나 키우고 있으니 이것 또한 거지같다. 내가 학부 때 진작부터 온갖 다양한 활동들 해 보면서, 이런 활동을 하면 어떤 폐단이 있고 저런 활동을 하면 어떤 수고를 해야 된다는 등의 견적을 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나 보다. 역시나 앞서 얘기한 대로 내가 대략 2년씩 남들보다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서 아주 속상하다. 진작에 잘 했으면...


내가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자녀 계획을 전면 취소했을 것이고, 그외 내 인생에 잡다하게 걸쳐져 있던 연구와 관련없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활동들도 다 중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연구 주제에 대해서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던 그 시절에 내가 내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켜서 하루라도 빨리 실제 실력을 키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 인생은 결국 핵심 역량에 대한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축구 공격수는 골을 넣어야 하고, 골키퍼는 공을 막아야 한다. 박사과정은 좋은 저널 논문이나 좋은 학회 논문을 써야 한다. 그 외의 잡다한 활동들로부터 얻는 실력을 논문 말고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결국 논문이 없으면 실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연구실에 온갖 기여를 하고, 과제 관리를 잘 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푼돈밖에 안되는 연구비 외에 내가 얻는 것은 죄다 눈에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고, 인생의 중년과 노년이 되어서야 쓰일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핵심 역량을 입증하지 못한 채 습득하는 그런 곁가지 능력들은 결국 쓰임받을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썩어버릴 것이다. 


공부해야 할 때 제대로 해야 하고,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시기를 놓침으로써 생기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런 심각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좋게 말해서 믿음이고, 나쁘게 말해서 멍청함이다. 더 이상은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다. 제발 프로페셔널 답게 실력을 갖고 싶다. 내 실력으로 내가 박사학위 받을 만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싶다. 최근 들어서야 이러한 열망이 생겼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내 인생은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방해물이 너무 많이 생겼다. (어떻게 자기 딸아이를 보고 방해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가? 나와 똑같은 상황이 되어 보라고 하고 싶다. 겉으로는 아기와 행복하게 즐겁게 놀아 주고 함께 좋은 추억은 의무감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만 지금 내 속은 우리 가족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듯한 걱정에 새카맣게 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 줄까? 내가 아기의 정서발달에 악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의무감에서라도 놀아 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상태다.)


속상하고 답답하다. 이 분노의 마음을 동력으로 삼아서라도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에 실험이 좀더 진행되기를 바라며, 이렇게 답답한 마음을 글을 통해서라도 쏟아내고, 훌훌 털고 연구를 조금이라도 더 가볍게 진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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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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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심리적으로 매우 안 좋을 때 작성한 글입니다. 글 전반에서 부정적인 표현이 많은 점 양해를 바랍니다. 항상 이렇지만은 않습니다.


*글을 대대적으로 수정하려다가, 그냥 아직 어린 신앙인이 갖는 솔직한 고민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놔두기로 했습니다. 대신 이후로 점차 변해 가는 마음가짐을 새 글로 써서 공유하겠습니다.



<관련 글타래>


*과연 교회는 기혼자 대학원생을 올바르게 양육할 수 있는가?, http://skylit.tistory.com/208

*회피성 성격장애와 번아웃 상태를 극복하고 싶다, http://skylit.tistory.com/211




요즘 주어지는 시간에 비해 맡은 일을 처리할 때 역량 발휘가 충분히 되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연구실 일뿐만 아니라 주일에 교회에 가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솔직히 주일에 예배 드리러 어차피 가는 것이고, 단지 나는 예배드리는 시간에 extra로 약간의 수고를 더해서 15분 정도 앞에서 찬양팀과 같이 찬양을 하는 정도인데, 그마저도 부담을 느낄 정도로 마음이 편하지 않다. 노력의 절대량으로 봐서 어려운 점이 있다기보다는, 찬양인도에 대한 동기를 많이 상실해서 자꾸만 부담을 느끼는 것이 문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선교단체의 찬양팀을 꾸리는 것은 아니고 음악적인 완성도를 철저하게 추구해야 하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토요일에 짧게 연습하고, 주일에도 조금 더 일찍 가서 잠깐 연습하고, 예배 중간에 앞에 나가서 찬양하는 이 모든 시간과 노력이 그저 부담스럽게 되었다. 마음이 지쳤다.



*연구에 대한 인식 변화


그에 비해 연구는 차라리 상황이 좋아진 것 같다. 개인 연구주제에 대해서 이와 비슷한 번아웃 상황을 이미 3-4년 전에 겪었고, 그 뒤로 조금씩 실력을 쌓으면서 이제는 좀 괜찮아졌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구와 실험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므로 많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실험을 하거나 논문을 쓰다가 중간에 어떻게 해결할 지 모르겠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답답해지지만, 그래도 조금씩 해결해 가고 있어서 좋다.


박사과정 고년차인 지금쯤 되어서 돌이켜 보니,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어렵더라도 진득하게 그 문제를 계속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해 보고, 실패와 쪽팔림을 무릅쓰고 주변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얘기해 나갈 때, 바로 이 때 조금씩 내 역량이 성장해 왔었다. 지도교수님이 석사과정은 내가 맡은 분야의 연구와 '연애'를 하는 것이고, 박사과정은 해당 연구와 '결혼'을 해서 인생 전체를 쏟아붇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박사과정 기간은 인생 전체에 있어서 최고로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며, 박사과정 시기에 그렇게 집중을 해야 나중에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도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하셨다. 요즘 지도교수님의 이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만큼 최고로 집중해서 아직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내는 것이 박사과정의 역할이고, 그렇게 집중적으로 하지 않으면 단 한발짝도 진전이 없다. 내가 그렇게 박사과정 초반의 2년 반 정도를 날려먹었다. (과제 관리 기술 말고는 내 연구주제에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암흑기였다.)



*또 하나의 변수, 육아


하지만 실제로 결혼을 하고 육아를 시작하면서부터 내 삶의 상당 부분(집중력, 시간, 체력 등)이 육아에 할당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박사과정으로써 꾸준히 집중을 지속하는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꾸준히 집중하는 연속된 4시간을 쪼개서 2시간씩 써 봤자, 연구를 진전시키는 데 아무 도움이 안되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꽤 절망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꾸준히 집중할 시간을 만들어서 하루라도 빨리 졸업요건을 채울 수 있는 논문을 만들어 내고자, 최근 몇 달 간은 저녁시간부터 늦은 새벽까지 아예 연구실에 상주하면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게 초반에는 꽤 효과가 있었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자 만성피로와 수면부족에 시달리면서 집중을 많이 못하게 되었다.


잠깐 쉬고 다시 달려야 하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하루라도 빨리 원하는 실험 결과를 찍어내고 싶은 마음에, 이 실험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해서 교수님과의 미팅도 자꾸만 미뤄지는 상황에 대한 조급함 때문에 지금도 멈추지 못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연구실에 다시 왔다. 방금 전에 아내와 아기와 함께 외식을 하고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고, 잠시나마 캠퍼스에서 산책도 하면서 아기와 놀아줬으니 그나마 최소한의 육아는 했고, 집에 아내와 아기를 차로 태워다 주고 나서는 집에 계속 있으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연구실로 핸들을 돌렸다.

정말 멈출 수 없는 '화차'가 된 심정이다.


이렇게 육아가 인생의 대부분을 동원해야 할 정도임을 글로만 이해하고 몸으로 알지 못했다가, 이제 와서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진작에 몸으로 이정도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 아기를 갖지 않았을 텐데... (지금 커 가는 아기가 싫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니다. 딸아이가 커 가는 모습은 정말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쁘다. 하지만 아기를 가져야 하는 선택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무조건 졸업 뒤로 미룰 것이다.)



*결국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문제


내가 딱 1년 전에 지금과 같은 연구 역량과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면 이정도로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1년 정도면 SCI 논문 어디든지 써서 결과를 받을 수 있고, 그 동안 좋은 학회논문들을 다작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년까지도 나는 바보같이 프로젝트와 연구실 전체적인 연구 조율(석사과정들의 논문 2저자 참여) 등을 핑계로 개인연구에 이기적으로 많은 시간을 쏟아붇지 못했기에 이제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채 개인연구만 하고 있다. 이제서야 제대로 된 실험환경이 갖춰졌고, 여기서 조금만 더 집중적으로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라는 것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청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 부부는 예배 찬양팀 여기저기 사역하느라 바빴고,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야 모든 사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기가 돌이 지나자, 다시 간곡한 부탁(?)에 의해서 사역이 점점 치고 들어오고 있다.


이제는 더이상 순진하게 간곡한 부탁들을 수용할 수가 없다. 앞으로 그 어떤 사역 요청이든지 매몰차게 모두 거절할 것이다. 누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가?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내 인생을 보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비록 그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결코 믿을 수 없다. 대신 박사학위를 받아줄 것도 아니니까.


자꾸 생각하다 보면 크리스천으로서 박사학위를 굳이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될 때도 있지만, 이건 지금의 번아웃 상황을 극복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찌 보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기도 하다. 일단 세상에서 내 앞에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인의 자세다. 세상에서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민폐를 끼치면서 교회 사역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그런데 내가 요즘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감당해야 하는 사역들이 부담이 되는 것이다. 내가 교회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위로는 더이상 위로가 아니다. 더욱 더 부담을 가중시킬 뿐이다. 아무래도 안식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대학교 교수도 안식년이 있고, 심지어 목사와 선교사도 안식년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평신도 사역자는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이 씁쓸하다. 도대체 무엇이 교회 공동체인가?



*결론


프로야구팀은 지금 등판해 있는 에이스 투수가 잘 던지다가도 어느 순간 조금 흔들리는 기색이 보이면 가차없이 투수를 교체한다. 정신력을 고취시키고 격려만 하면서 그 에이스 투수가 계속 경기를 끌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국 에이스 투수는 투수대로 소진되고, 팀은 자칫 대량실점으로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선수 개인과 팀 전체의 지속을 위해서라도, 충분히 몇 이닝 더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선수조차도 강판시키는 게 야구인데, 교회는 지금 던지는 투수의 물리적인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응원만 열심히 하는 식으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 평신도를 사역에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요즘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바쁘거나 어렵기는 매한가지인 것을 나도 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신앙의 역량이 충분해서 척척 맡은 일을 해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 내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사람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역을 꽤 오랫동안 해 온 사람이라고 해서 또 다 그렇게 매우 훌륭한 신앙으로 무장해 있는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훌륭한 신앙의 사람조차도 어느 순간 여러 변수에 의해서 힘든 시기를 충분히 겪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에 그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신앙 안에서 회복할 수 있게 사역 일선에서 끌고 내려와서 쉬게 하고 '구원투수'를 등판시킬 수 있는 체계가 과연 교회에 있는지 묻고 싶다.


내가 약해빠진 신앙의 초보라는 사실이 주변에 널리 인식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정말 좀 쉬어야겠다. 그리고, 가능하면 박사학위 받고 나서 최소 주 단위로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면서 마음을 정리해야겠다. 그리고 내 비전을 다시 정리할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을 것이고, 사역 대신 성경공부와 같은 양육훈련부터 신경쓸 것이다. 이타적인 삶을 넉넉히 살아내기 위해서 지금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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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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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정말 정보가 폭발하는 시대다. 인터넷 덕분에 각종 공부할 것들에 접근하기는 아주 쉬워졌다. 하지만 그로 인한 전 세계적인 시너지로 인해서 정보의 재가공 결과물이 또다시 인터넷에 아주 빠르게 대량으로 올라온다.

매달 내 연구의 큰 주제에 해당하는 무선 네트워킹, 사물 인터넷 등에서 생산되는 논문들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데, 이걸 다 읽어보고 따라잡으려고 한다면, 다 읽기 전에 이미 엄청난 양의 새로운 연구 결과가 쌓여 있을 것이다.


결국 아주 세밀하고 자세한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으면 엄청난 정보의 생산과 기술의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좀더 똑똑한 사람은 더 빨리 논문을 읽고, 더 빨리 자기 문제를 만들어 내서 기술 발전에 기여할 것이고, 나처럼 그렇지 못한 보통의 사람은 부족하게나마 아주 작은 기여라도 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처럼, 이렇게 지식이 새로운 지식의 생성/누적을 가속화시키는 정보의 지수 상승(exponential) 시대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연구실에서 광범위한 부분을 조금씩 공부했었다. 최근 들어서는 졸업의 압박 때문에 내 본래 연구주제만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수렴 국면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생각하기에도 과할 정도로 넓은 분야를 조금씩 건드리고 있었다.


어쨌든 메인 연구주제는 상황인지 무선 네트워킹 기술이다. 서비스의 다양성을 네트워크가 지금보다 더 많이 이해해서 무선 네트워크의 세밀한 부분을 자동으로 맞춤형 조작을 해서 전체 성능을 높여 보려는 시도이다.

연구실은 오래 전부터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스템을 가지고 대형 연구과제도 여러 번 수행했고, 지금도 과거의 유비쿼터스 컴퓨팅을 사물 인터넷(IoT) 플랫폼으로 발전시켜서 계속 개발하고 있다. 문제는 이 시스템(System)에 전산학의 대부분의 연구내용이 컴포넌트 또는 모듈로 들어가기 때문에 무엇이든 새로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인지는 이어서 생각해 보겠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연구실 입장에서는 전체 시스템의 목적에만 부합한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를 적용시킬 수 있어서 좋고, 학생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연구주제가 막 적용되기 시작했을 때에 맞춰서 공부를 시작하면 더없이 좋지만, 얼마 전까지 공부했던 주제와 새로 중요성이 부각된 주제가 공존하는 시기에는 이 모든 주제를 다 공부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박사과정에게 부담이다. 석사과정은 IoT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주제의 중요성을 인식할 때쯤 돼서 졸업해서 나가는 경우가 많고,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할 때쯤 돼서 새로운 석사과정 신입생이 들어오기 때문에 대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박사과정의 경우에는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역할과 함께 석사과정의 사수가 되어서 같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석사과정에게 약간의 지도(지도교수만큼의 지도가 아니라, 지도교수까지 포함한 세 명이 함께 연구하는 상황에서의 도우미 역할)를 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지금 연구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러 연구주제를 섭렵해야 한다.

 문제는 "서비스(service; application)"와 인접한 시스템, 또는 실제 응용되는 사례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설계하는 시스템을 연구/개발할 때 특히 부각된다.


위와 같이 "동시에 우물을 파는 상황"은 어떤 연구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더욱 심화되기도 한다. 우리 연구실은 전산학부 소속이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타 전공의 대학원 연구실들과 연합해서 공동연구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은 그 공동연구 과제의 총괄책임자가 되셨고, 자연스럽게 나는 실무책임자가 되었다.

IoT 시스템과 무선 네트워킹 기술 정도는 서로 포함되는 관계였고, IoT 환경에서 무선 네트워킹이 직접 쓰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컴퓨팅 시스템에서 네트워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역할을 현실적으로 맡아야 하는지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타 대학원과의 공동연구는, 사실 내 입장에서는 범위가 너무 넓어지고 말았다. 


공동연구과제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데이터를 기본적으로 활용한다. 여기에 웹의 각종 정보를 크롤링해 와서 분석하고, 그 분석결과를 가지고 새로운 정보를 추천하는 데이터마이닝을 핵심으로 하는 과제이다. 다른 연구실은 SNS 데이터 수집, 자연어를 형태소 분석해서 정형화하는 과정, 그 정형화된 데이터를 분석해서 각종 의미(감정, 행동 등)를 찾아내는 연구, 유사한 개념 간 연관성을 정의해서 정보 추론/추천을 하는 연구 등을 수행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연구실에서 그동안 만들어 온 IoT 시스템이나 무선 네트워킹 기술에서 그 어떤 세부 컴포넌트도 적용시킬 수 없었다. 분야가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공통점이 있다면 '컴퓨팅 시스템'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IoT 시스템이나 그보다 소규모의 통신 시스템을 만들면서 배웠던 각 세부기술의 요구사항 분석, 각 세부기술을 대표하는 블록 정의, 블록 간 상호작용, 전체 시스템 구성 작업을 이 공동연구과제에 적용할 수는 있었지만, 한번도 시스템 구축을 해본 적 없이 각자 자기 세부 기술만 열심히 연구해 오던 학생들 데려다가 시스템 구축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우리 연구실도 그 '데이너 마이팅 시스템'에서 하나의 컴포넌트를 맡아서 연구해야 했으므로, 그나마 기존 IoT 시스템과 연관지을 수 있는 내용을 찾아서 골랐고, 이걸 바탕으로 실제로 구현까지 해야만 했다. 당시 과제는 사업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름은 원천기술 개발이지만 실제로 당장 창업해서 서비스를 돌릴 수 있을만한 완성도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정말 그 당시에 돈은 쥐꼬리만큼 주고 원천기술에 시장성까지 바라던 미래부가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그래 놓고는 우리 과제가 논문 실적도 초과달성하고 정량적 목표치도 초과달성 했더니, 총 3년의 연구기간 중에서 2년차를 마치는 시점에서 이미 할 거 다 했으니 더 할 필요 없다면서 조기종료 시켜버렸다. 말이 좋아서 조기종료지, 원래 총 3년 동안 매년 5억씩 총 15억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해 놓고서 10억만 주고 과제를 잘라 버린 것이나 다름 없다. 짤렸는데 허울 좋게 '조기종료' 라는 말을 붙줬을 뿐. 

(여기서 미래부 내부에서도 예산 쟁탈전이 치열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예산이 없으면 결국 없는 논리도 만들어서 있는 과제를 잘라내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그래놓고 트렌드를 반영할 만한 새로운 주제로 그 돈을 다시 쏟아붓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이런 여건에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원천기술"이 제대로 개발될 리가 없다. 일본이 IPv6를 꾸준히 지원해서 결국 IPv6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권위를 갖게 된 점을 본받아야 한다. 물론 IPv6 자체가 여전히 활발히 쓰이지 않고 있는 것은 문제다. 제대로 된 주제를 발굴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니까...)


아무튼 이런 과정 때문에 내 고통의 기간은 2년 더 늘어났다. 애초에 나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많이 떨어지는 과제를 관리해 오다가, 그 과제가 중간에 짤리니까 중단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 새로 제안서를 썼고, 결국 또다른 2년짜리 공동연구 과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우리 연구실은 무선 네트워킹과 전혀 상관이 없는 데이터 마이닝에 관련된 세부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제로 개발을 수행하는 석사과정 학생은 그게 본인의 석사과정 연구주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나는 논리와 방향이 맞는지 보고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만 하는 것으로 부담이 줄어든 것이겠다. 물론 여전히 지도교수님이 총괄책임자시기 때문에 다른 연구실과의 상호작용 및 전체 시스템 구성은 결국 내가 해야 한다.)


이렇게 학제간 연구를 강요받으며 지금까지 왔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이렇게 생각외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게 된 것이 장기적으로 결코 손실은 아닐 것이다. 결국 모두 도움이 되고, 생각의 지평을 넓혀 주기도 하고, 내가 잘 못하는 전체 그림을 그리는 훈련을 계속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공부했던 분야들을 조합해서 아주 똑똑한 네트워킹 기술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IoT 시스템의 데이터 마이닝 과정을 더 개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졸업을 해야 하는 박사과정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지나치게 넓은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독이 되는 것은 아닌지도 걱정될 수밖에 없다. 박사학위의 의미 [1]에서 보듯이, 하나의 세밀한 연구분야의 정점에 와서 그 벽을 뚫어 나가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다양한 여러 개의 분야에서 그 정점에 못 미치는 수준까지 공부하느라 정작 내 메인 연구주제를 소홀히 하게 되서 졸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수시로 엄습해 오기도 한다.


이제는 더이상 박사과정을 오래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고, 남은 시간도 이제 얼마 없다. 이제 더이상 늘릴 수 있는 재학연한도 없는데 휴학까지 해 가면서 박사과정을 연장하고 싶지는 않다. 남들은 연차 이내에서 뚝딱 잘도 해내는데, 나는 위와 같은 과정을 겪느라 집중하지 못했다고 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변명을 하면서 지금 이 상태가 되었다. 정말 자존심 상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여러 우물을 최대한 파 두는 것은 결코 손해볼 것이 없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지금만큼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나는 그동안 너무 순진하게 주어지는 대로 닥치는 대로 다 공부해서 모두 다 소화시킬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그게 이렇게나 오래 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의 역량을 과대평가 했거나 자신을 속여 왔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정말 슬프지만, 나는 잘 나가는 IT 천재들처럼 그렇게 똑똑하지 못하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지혜롭게 공부하고 싶다. 내 목표 달성을 위해서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결정해서 움직이고 싶다. 나는 언제쯤 이런 것들을 잘 조율해 가면서 내 인생을 내가 앞가림해낼 수 있을까? 바보같지만, 내일은 오늘보다는 덜 바보같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자.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좀더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오늘 남은 하루 동안에는 내 졸업연구 분야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뤘으면 좋겠다. 제발 집중 좀 해 보자. ㅜㅜ




<참고자료>

[1] 박사학위의 의미, http://wintree.tistory.com/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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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서 실제 환경에서 내 연구분야와 관련된 지식이 확장되는 기쁨과 동시에 이걸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절망, 곧이어 또다른 지식의 확장에 대한 경험의 연속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다. (...) 전산학/컴퓨터공학의 세부 분야라면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애초에 이론을 완벽하게 습득하지 않은 채로 계속 다음 단계로 전진하다 보면 실전에서 모래성과 같이 허술하게 쌓여 있던 그동안의 지식이 깨지게 되고, 결국 실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론을 재정립하고, 실제 환경에서 어떻게 이론이 적용되는지도 배우게 된다. 물론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실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론 기반이 약할 경우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내가 석사과정 2년차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무선 네트워크 분야의 연구주제를 선택하면서, 비교적 최근까지 얼마나 내가 이론이 약한 상태였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제서라도 네트워크를 실제로 운용할 때 필요한 일부 요소들(여전히 극히 일부인 것 같다.. 에휴)을 하나씩 재정립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학생이니까 실수하고 배우는 것이 용서가 되지, 만약 박사가 되어 세상에 나가서 똑같은 경험을 하고 살았다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뭐 사실 학생 신분도 이제 시한부가 되었다. 무한정 학생일 수는 없다.)
최근에 내 연구의 실험 환경인 와이파이(IEEE802.11) 기반의 멀티채널 무선 메쉬 네트워크(multi-channel wireless mesh network)를 구축하고 실제로 트래픽을 만들어서 보내면서, arp, route (커널 라우팅 테이블), iptables, hostapd, dhcp 등의 다양한 도구들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고, 커널에서 netlink를 통해서 패킷을 처리하는 절차, 패킷이 버퍼링되면서 발생하는 지연 문제, 그 원인을 제공하는 intra-flow interference, inter-flow interference 등에 대해서도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퀄넷(QualNet) 네트워크 시뮬레이터에서는 메쉬 네트워크 만드는 매뉴얼에 따라서 만들어 놓고 노드 몇번에서 다른 노드 몇번으로 패킷을 몇개 보내라고 시키면 위에 언급된 각종 도구들의 역할을 전혀 몰라도 실험하는 데 아무 이상이 없었고, 성능 측정 결과도 바로바로 나왔다. 그러면 나는 그저 next-hop으로 패킷을 전달하는 부분만 고쳐 가면서 실험해서 그래프를 만들어 내면 되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무선 메쉬 네트워크가 서로 기본적인 "연결"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기본적인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여기에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을 연결해서 인터넷을 하거나 서로 통신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것저것 시도하면서부터는 더더욱 멘붕 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서야 여러 앱들을 돌리고 네트워크 상태를 모니터링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실제로 나만의 "라우팅"을 적용할 수 있겠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서 실험을 했으나, 근본적으로 라우팅만 가지고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임을 인식한 직후에는 또 한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래서 내가 저널에 투고한 논문이 reject 되었던 것일까?

------------------- 내가 다시 석사과정 2년차 또는 박사과정 1년차로 돌아간다면, 당장 노트북이든 보드PC든 라우터든 여러 개를 가져와서 실제로 돌아가는 무선 네트워크 실험 환경을 구축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한 학기가 넘게 걸리든, 거의 일 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테스트베드 환경 구축을 강행할 것이다. 그렇게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테스트베드를 만드는 작업 그 자체가 적어도 나에게는 이론을 동시에 습득하기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선 네트워크 환경에서 패킷이 머신 하나에 들어오고 나가기까지의 모든 세부 절차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그 다음에야 실제로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 상황을 상상해 보고, 매일매일 테스트베드 환경에 돌려볼 것이다. 만약 기존 환경에서 잘 해결이 안 된다면, 그것이 최소한의 research goal은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단독으로 그 목표를 해결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이제 기존의 논문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공부해서 그 개념을 실험 환경에 적용해서 돌려볼 것이다. 물론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만, 기존 연구는 반드시 최고 수준의 학회/저널에서 최근에 발간된 논문들 중에서 찾을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최고 수준의 학회/저널에 올라오지 않는 주제라면 사실 조심해야 한다. 모 아니면 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해결이 필요한 실용적이고 중요한 문제인데 아무도 해결하지 않았거나, 해결할 가치가 없거나(공학적인 의미가 없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일 확률을 1%도 안 된다.

그런데 아마 내가 관심있어 하는 가장 최근의 핫한 연구분야는 내가 앞서 '이론의 실제화' 과정에서 구축한 테스트베드에 비해 이미 여러 단계 앞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오픈소스로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어 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기본적인 테스트베드를 구축하는 연습은 적어도 네트워크 분야에서는 안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저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신기술을 바로 적용하면 그 내부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결국 언젠가는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최신 기술을 바로 설치해서 써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세부 개념과 원리를 익혀 가는 방법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요즘 핫한 SDN 도구 중 하나인 OpenFlow나, 그 위에서 작동하는 ONOS 같은 컨트롤러 패키지부터 설치해서 써 보는 것.) 어쨌든 결국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지식은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즉, 성향에 따라서 어느 방법이든 선택해서 열심히 익혀 나가는 수밖에 없다.

비록 많이 늦었지만, 이제서라도 이론을 다시 쌓아올리고, 실제 환경과 습득한 이론 사이의 간극을 줄여 가고 있으므로, 조금 더 노력해서 반드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다. 남부끄럽지 않은 박사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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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작년 겨울에 제출했던 저널 논문이 선택되지 못하고 reject 되었다.

개인적인 상황을 놓고 볼 때는 이번 저널 실적을 잃음으로써 박사학위 취득을 향한 길은 더 어려워졌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고, 지금이 나 자신의 지금까지의 모습을 절실하게 반성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두서 없이 일사천리로 써내려간 스스로를 향한 냉정한 판단을 여기에 기록함으로써,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항상 명심하고자 한다. 우선 "이번에 제출한 저널 논문이 왜 채택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대답에서 시작한다.


*근본적으로 가장 최근의 관련 연구 동향(state of the art)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예전에 많이 찾아두고 정리한 논문들이 있지만, 그 후로 내 연구주제에 부합하는 최신의 연구들이 나왔는데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 소홀했다. 비록 과제 때문에 바빴더라도 이것은 박사과정으로써의 직무유기라고 봐야 한다.

 - 이로 인해서 가장 최신의 잘 나가는 기존 연구에서부터 앞으로 해당 분야의 기술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분야는 일치하지만 이미 연구가 끝났거나 진보성이 없는 오래된 연구들로부터 문제점을 찾아서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상태가 되었으며, 그렇게 정리한 논문은 별로 실용적이지 못했다.

 - 리뷰어 입장에서는 예전부터 많이 해 오던 기존의 연구들과 다를 바 없는 one another paper로 보였을 것이다. 즉, 별로 재미가 없어 보였다는 의미.

 - 결국 "실제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contribution을 잘 모르겠다" 등의 리뷰 의견를 받게 되었다.



*State of the art를 제대로 찾다 보면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던 것들의 상당 부분은 기존 연구들에서 이미 해결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연구분야의 현재 세계 최고 수준에서부터 앞으로 사용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까운 미래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금 세계 최고 수준에서 더 개선될 부분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당연히 앞으로 무엇을 더 개선할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듯이 발전시켜야 할 부분은 반드시 있다. 단지 그 발전방향이 실용적인지 (공학 연구를 하고 있으므로 실용성을 버릴 수 없다) 검토해 보아야 한다.

 - 내가 설정한 목표에 대한 해결방법은 웬만하면 기존 연구들 중에 있다고 봐야 한다. 내가 생각해 내는 전에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는 99.99% 이미 다른 사람도 생각해 봤던 것들이고, 또 이미 상당수는 이미 논문으로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저명한 저널/학회들의 논문을 검색해서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최신의 reference list를 확보하고, 각 논문의 목적과 scope, 문제와 방법론, 검증방법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 하루에 관련 분야의 좋은 논문을 1개 이상 읽고 정리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시점이다.

 - 좋은 논문을 구글에만 의존해서 찾지 말고, 내 연구 분야에 해당하는 저명한 저널/학회 홈페이지에 직접 방문해서 논문 목록을 살펴보고 키워드로 검색하 노력이 필요하다.



*연구의 필요성에서부터 그 필요성을 충족하기 위한 방법까지 연결되는 전체 그림이 명확하게 나와야 한다.

 - 그래야 related work에 대한 분석의 기준도 명확해지고, subsection으로 나눠져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분석이 가능해진다.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프레임 자체가 남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구성은 아닌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이미 많이들 다룬 너무 구태의연한 주제는 아닌지, 더 연구해 봤자 해당 분야 기술이 도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dead end), 일반적으로 잘 일어나지 않는 특수한 상황(게다가 중요하지도 않으면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서만 다뤄서 실용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객관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잘 납득이 안된다면 어렵더라도 납득이 될 만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

 - 더 일반적으로 자주 발생하는 상황을 해결하도록 범위를 넓히거나,

 - 지금 당장은 흔히 발생하지 않지만, 최근의 기술 트렌드와 일치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으면서 앞으로 점점 수요가 많아질 것으로 기대되는 유망한 분야의 기술적 한계거나.

 - 흥미롭고 좋은 해결방법이 떠올랐더라도 앞으로 점점 쓰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면(e.g. IEEE 802.11n/ac 등 고성능의 와이파이가 시장에 확대되는 현재 상황에서 오래되고 느린 IEEE 802.11b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등), 그 연구는 dead end이므로 빨리 포기해야 한다.



*박사과정 연차와 연구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반대로 생각하면, 연차에 걸맞는 연구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 박사과정 신입이나 저년차는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서 연구 역량이 성숙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고년차가 된다고 저절로 SCI급 저널을 써낼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직장처럼 근속년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직급이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상황은 연구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연차가 높아진 만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 롤플레잉 게임에서도 직접 몬스터를 때려잡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경험치를 올리지 않으면, 나의 경험치를 대신 올려주는 파티원이 없을 경우 결코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파티원은 현실에서는 없다. 누가 내 연구를 대신해줄 수 있겠는가? 지도교수? 선후배? 결코 그럴 수 없다. 지도교수는 큰 연구주제 정도는 설정해 주지만 내 분야의 최신 연구를 대신 찾아서 읽어주고 문제를 정의해 주는 봉사자가 절대로 아니다. 그 일은 내가 해야 하고, 지도교수는 올바른 연구 방향을 설정해 주는 역할을 갖는다.)

 - 게다가 연구실은 나 혼자만 있는 곳이 아니다. 연차에 맞는 역량을 갖고 후배들을 돌봐주고 공동 논문작업 등을 잘 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 내가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연구실 전체가 하향 평준화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될 일이다. (바쁜 지도교수님이 개별 학생을 모두 일일이 관리하시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 내 연구분야의 박사들 수준에 맞는 연구 역량을 갖고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 보고,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연구역량을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수준이 낮은 저널/학회라고 제대로 준비가 안된 내 논문을 쉽게 승인(accept)해 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 수준이 낮다고 생각되는 저널 중에서도 홍보가 덜 되었거나 아직 오래되지 않아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논문의 질도 바례해서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다.

 - 그렇게 쉽게 받아주는 저널/학회가 실존하더라도 그런 곳에 내서는 안된다. 스스로 쓰레기 더미로 들어가고자 하는가?



*노력의 절대량이 부족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 논문 하나를 읽고 정리할 때 충분히 집중해서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는가?

 - 최신 연구동향을 어느 학회/저널의 어떤 연구가 있으며 각 연구의 핵심 방법론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는가?

 - 여러 핑계거리가 있어도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연구자라고(professional) 할 수 있다.



*박사학위 논문을 언젠가 완성하게 될 막연한 것으로 생각하니까 제 시간에 노력해서 끝내지 못하고 연구 진행이 자꾸 늘어지는 것이다.

 - 올해 졸업하고자 한다면, 올해 졸업하지 못해서 느끼게 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명확하게 언제까지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자.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간목표(milestone)를 정하고 매일같이 체크해야 한다.

 - 중간목표를 제 시간에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두렵다고 해서 애초에 목표를 아예 설정하지 않는 것은 대학원생에게 매우 중대한 결함이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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