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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반쯤 되었는데, 이제서야 업무 프로세스가 대략 보인다. 그리고 회사 전반적으로 무엇에 '긴급함'을 느끼고 무엇에 '중대함'을 느끼는지도 조금은 분간할 것 같다. 물론 완전히 분간하지는 못한다. 아직도 모든 일을 우선순위 동일한 task로 보고 queue에 들어오는 대로 처리하는 경향이 남아 있어서...

처음 1년 간은 경력신입(박사는 경력 입사인데, 교육은 신입의 1/10도 안함) 포지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라도 나한테 일이 오면 완전 그 업무의 끝장을 보려고 달려들었는데, 이제는 부서 차원에서 내가 어느 쪽 일을 맡아야 하는지 가이드를 해 주는 느낌이다. 사실 부끄럽고 아직도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왜냐하면 현장의 실제 돌아가는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서 기획이니 설계니 신기술이니 이런 얘기를 해야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안 될 테니까 말이다. 혼자서 아직 기획/설계/투자/구축/운영 과정 전체를 해본 적 없어서 온전한 1인분이라 말하기 좀 부족하다 보니 더 현장의 세세한 이슈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직접 확인해 보거나, 그걸 처리하는 다른 동료의 어깨 너머로 계속 나도 참견하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2021년부터는 오로지 타의에 의해서 중요한 보고 자료 정리를 두 가지 맡게 되었고, 문제의 원인 분석, 현황 조사, 개선 대책 등을 보고하기 위해 자료를 많이 정리했다. (보고는 고참 분들이 하심.. 아마 내가 보고하면 있는 대로 다 얘기해서 폭풍이 몰아칠 듯)

문제는 우리 부서 일이 아닌 것 같고, 문제 원인을 파악하면 할 수록 이건 우리 소관이 아니고 원인이 되는 장비와 그것의 담당 부서가 다른 부서임이 명백해지는데도 해당 부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바쁘고 당장 직면해 있는 긴급한 처리 건들도 많아서 그러겠거니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 원인을 검증하려고 테스트도 여러 번 했는데(이 과정에서 협력사 등등 여럿이 미리 계획하고 결재도 받아 가면서 움직여야 했다.) 한 번도 참여를 안 하고 문제의 원인도 아니라고 발뺌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테스트도 하고 정리도 하고 자료도 찾아보고 등등 내가 다 하고서, 윗선(많이 높은 윗선...)에 본격적으로 보고를 했더니, 누가 봐도 빼박 저쪽 부서의 특정 장비의 뭔가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되었다. 사실 우리 부서 선배분께서 최대한 일반화된 표현과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빨리 개선하고 끝내는 방향으로 보고를 했지만, 집요한 질의응답 과정에서 결국 나도 "결과 데이터가 알려 주는 그대로" 얘기를 했고, 회의실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대충 뭐 왜 그렇게 오랫동안 안바꿨냐, 그걸 관리하는 협력사는 왜 제대로 안하냐, 이러면 다른 데도 문제 있는거 아니냐 등등...

아무튼 보고가 끝나고, 그제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해당 부서는 이제서야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테스트 결과를 신뢰할 수가 없다고. 자기들+자기들이 관리하는 협력사와 함께 똑같은 테스트에 참관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똑같은 문제가 일어나는지 보겠다고, 그 뒤에 공식적인 의견을 만들어 보고하겠다고 한다. 이럴 거면 진작에 그것도 테스트를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반복하고 얘기도 많이 했는데 그 때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 사실 원인 분석할 때에도 내가 맡은 일과 관련이 없는 다른 장비의 다른 서비스를 대신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마지막으로 원인 분석에 대한 결론이 어느 정도 나와서 종료시키고 테스트 환경도 다 철수시켰는데 자기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까 이제서야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보니 매우 짜증이 났다.

내가 열심히 했던 것은 오로지 목표 지향적인 이유였다.
"문제가 발생했고, 원인을 분석해서 빨리 개선하는 것."
"테스트가 필요하다고 하니, 최대한 실제와 유사한 조건에서 반복 수행하고 데이터를 최대한 얻는 것."
"얻은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확실히 아는 데까지는 원인과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

그리고 근본적으로(네트워크 교과서적으로) 따지면 사실 우리 부서의 범위(즉, 네트워크 7계층 중 아무리 멀리 잡아도 4계층 이하의 범위)라고 볼 수 있어서 수긍하고 열심히 했던 것인데, 정작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장비의 명백한 담당 부서와 담당자는 수 개월 동안 "그럴 리가 없다", "다른 탓이다"고만 하면서 버텼었다. 내가 그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을 다 불식시키기 위해서 조건을 바꾸고 반복도 하고 데이터도 더 만들고 자료도 더 찾아서 정리한 것인데 말이다. 결국은 보고하는 자리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고 나서야(우리 부서가 발표했으니 결국 우리 부서가 혼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어 기제가 발동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고 있으니, 내가 너무 목표지향적으로 주어지는 일의 해결에만 몰두하는 것이 참 순진했던 것 같다. (현타 ㅋㅋㅋㅋㅋ)

일단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동의를 안 하고 "재검토 부탁드립니다"라는 예의바른 회신 이메일이 몇 주, 길게는 몇 달에 걸쳐서 오가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었는데, 그렇게 서로 일 안 맡으려고 총대 메고 메일 보내는 사람들이 다 10~20년씩 근속하신 베테랑 분들인 것을 생각해 보면 다들 산전수전 많이 겪고 나서 보호본능부터 발동하는 것일까 궁금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경영진이 대놓고 지시한 일인데! 상세히 파악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놓고 그건 아니라고 보고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그 문제를 오픈해서 개선하려는 의지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계속 내버려 두면 나중에 또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도 누군가(즉, 내가) 먼저 움직여서 어떻게 해주는지 들어 보고 동의만 하고 넘어갈 궁리만 한다.

이래서 회사가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 것이구나. 원래 졸업 전까지는 연구 주제 자체가 어려워서 그걸 해결하는 게 너무 막막해서 좀 목표가 명백하고 구현과 실행만 하면 되는 그런 일을 원했는데, 막상 회사에 와 보니(연구소는 다를 수 있다, 사업부라서 더 극명한 듯) 실행 자체에 벌써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서 답답한 것이 현실이었구나.

그래도 이미 여기까지 왔고, 한 차례 보고 후 2라운드가 시작됐으니 뭐... 이제 나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저쪽 부서가 직접 움직이도록 얘기를 해 봐야겠다. (사실 손이 근질근질해서 결국 내가 또 나서서 셋업하고 진행하고 먼저 움직일 가능성이 높지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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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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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고 기계적인 일은 직접 하지 않고 가능하면 석사과정에게 시키는 것이 박사과정이 가져야 할 능력일까?

위와 같은 이상한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 내가 관리해야 할 연구과제 수가 여럿 있고, 각 과제마다 중요하면서 오래 걸리는 일과 덜 중요하지만 빨리 처리할 일들이 있다.
  • 중요도/긴급함과 전혀 상관 없이, 그동안 내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시키려면 시킬 대상에게 개념과 도구, 각종 용어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해 주고 나서야 시킬 수 있는 일들이 꽤 많이 있다.
  • 결국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자료를 전달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 노력 + 후배가 일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내가 그냥 직접 처리하는 것이 더 빠르다고 판단되면, 나는 그냥 내가 일처리를 하고 만다.
  • 지도교수님이 보시기에는 박사과정 고년차가 되어 자기 연구에 집중해야 되는데 과제의 소소한 작업을 처리하느라 바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석사과정들에게 일을 좀 잘 시켜 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일차적으로는 교수님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하고, 그만큼 내가 context change 없이 개인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니까 일을 잘 시키는 것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제 때에 적절한 일들을 석사과정들에게 시키지 않으면, 그들이 제 때에 적당한 일들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연차가 올라가서는 오히려 그 연차에 걸맞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처리가 되지는 않고, 항상 플랜 B가 필요한 경우가 더 많다. 정작 급하게 일을 시키고 싶을 때 생각처럼 빠르고 간단하게 업무를 지시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내가 시키려는 일에 대해서 후배가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추가적인 공부가 필요한 경우가 되겠다. 사실 이것은 후배들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향한 지적이다. 왜냐하면 평소에 그 후배가 나와 연구 진행 상황에 대한 동기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해서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일을 시킬 때, 뭘 어떻게 시켜도 알아듣지 못하고 진행을 못할 정도로 실제로 능력이 부족한 경우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은 시키는 사람의 입장에서 목표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일을 자세한 task item들로 나눠서 어떤 도구를 쓰고 어디를 참고하라는 정도의 내용을 알려 주면 꽤 완성도 있게 일을 처리해 준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메일을 쓰거나, 문서에 work item을 나열하기 시작하면 그걸 시키는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는 데에만 꽤나 오래 걸릴 때가 있다. 그 시간에 차라리 내가 일을 시작하거나 프로그램을 돌리면 진작 끝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학생에게 일을 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지금 이렇게 가르쳐 둬야 나중에 비슷한 업무를 더 적은 노력으로 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목표가 설정된 업무를 효율적으로 시키려면 결국 평소에 미리 노력해서 후배와 일부러 토의를 하고, 지도교수와 토의한 결과나 과제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그때 그때 갱신시키는 수밖에 없다. 적당히 바쁘지 않을 때 미리미리 후배를 성장시켜 놓아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이쯤 되면 내가 박사학위도 없으면서 지도교수 노릇을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나는 여전히 일단 무슨 일이든지 내 선에서 내가 알아서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일이 넘쳐서 누군가에게 일을 시켜야 할 때가 되면 대부분 내가 시키려는 일의 디테일을 모르기 때문에 누구에게 맡겨야 좋을 지 고민이 될 때도 많다. 어떤 일들은 오히려 지나치게 간단해서 시키는 노력은 별로 들지 않지만, 그로 인해 시간이 더 걸려서 일이 전체적으로 밀리는 경우도 있다.


나 혼자 능력을 키우는 것과, 어떤 단체 속에서 단체를 함께 성장시키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나 혼자 능력을 키우는 것은 전적으로 내 시간관리와 내 책임으로 다 귀결되는 데 반해, 단체가 함께 성장하려면 치밀한 조직관리 skill이 필요하다.


적어도 나는 나중에 어느 회사나 연구소를 가든지 중간관리자 이상의 위치에 갔을 때 실무자의 실무적인 이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

다. 적어도 그 실무자가 하려는 일을 내 선에서 내 능력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실무자와 토의를 해서 가장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나는 이러한 욕심이 과도해서, 후배들에게 너무 일을 나눠주지 않고 나 혼자서만 능력을 키우려는 이기주의에 잡혀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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