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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지막 날에 연차를 쓰고
그 뒤로 연휴 3일 동안 어디 안 가고 집에서 잘 쉬었는데,
오히려 대상포진 진단을 받고 새해 첫 working day에도 출근을 못 하고 있다.

처음에는 등의 오른쪽 부분 날개뼈 있는 근육이 아파서 담이 걸린줄 알았는데,
일요일이 되어서야 오른쪽 옆구리에 붉은 반점이 올라오고
그 부위가 닿을 때마다 아픈 것을 발견하고 대상포진인 줄 알게 되었다.

내과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묻는다.
"최근에 무슨 일 있었나요?"

 - "아니요. 그냥 두달 전부터 초과근무를 많이 하긴 했지만..."

"그럴 때 걸리는 거에요."

 - "......"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개월 간 매주 거의 주 52시간 다 채우고,
연속 7일 출근만 아니면 주말에도 나가서 밀린 일처리 하고,
그렇게 월 217시간씩 일했더니 누적된 피로가 지금 온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한창 박사과정 막바지에 힘들 때에 비하면
최근까지 회사 일은 힘든 축에도 안 든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긴 받는가 보다.

 

일주일 치 약을 처방받고 와서 식후마다 약을 먹고 있지만,
아직도 연휴 때와 통증에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 ㅠㅠ
걱정되는 것은, 대상포진이 발현되면 신경을 파괴(...)해서
증상은 약으로 호전이 되더라도 통증이 장기간 남는 경우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대상포진 발현 후 72시간 내로 약을 먹으면 괜찮다는데,
문제는 내가 수포를 발견한 시점이 대상포진 발현 후 몇 시간 뒤인지 모른다는 것...

오늘 푹 쉬고,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통증이 가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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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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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입사하면서, 나는 내 이력에서 박사 타이틀을 떼어 버리고 오로지 열심과 업무수행 능력으로만 인정받고 싶었다. 내 입장에서 박사학위는 분수에 맞지 않지만, 그간 고생한 이력이 불쌍해서 학교가 나에게 "옛다" 하고 마지못해 쥐어 준 것이었다. 그런 부끄러움 때문에 채용 과정이 끝난 뒤에는 소셜 네트워크에서 학력을 다 없애 버렸다. 그러나 부서에 배치받고 나서 일을 하면 할 수록, 주위 동료들과 상사들은 나를 더욱 더 '네트워크 박사'의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름지기 공학박사는 특정 분야의 기술적인 한계가 어디인지 알고, 인간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기술적인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절차와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잘 했던 것은 특정 기술분야의 정점이 어디인지를 비교적 빨리 찾아내는 것이었다. 문제 정의는 지도교수의 가르침에 비해 평균 또는 그 이하여서 지도교수의 도움을 자주 받았던 것 같다.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문제 정의가 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려고 하거나, 정작 문제 정의를 해결하는 가장 핵심적인 action item 말고 곁가지를 먼저 챙기는 실수를 자주 했었다. 뭘 실험으로 증명해야 되는지 스스로 이해하기도 전에 실험 환경을 만드는 성급함이랄까...

그런데 회사에서 연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부서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박사의 문제 정의 능력이 필요한 업무는 여전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상사의 상사의 상사쯤 되는, 경영진까지 보고를 해야 하는 일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문제의 핵심을 제한된 분량의 슬라이드나 문서로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입사 후 초반 몇 개월 동안은 내가 회사가 돌아가는 그 자체를 익히느라 중요한 일을 맡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회사의 현황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 가끔 부서 차원의 결정에 관여하거나 윗선에 보고해야 할 때, 사람들은 나에게 박사로서의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회사가 나보다 더 체력도 좋고 두뇌 회전도 좋으며 (요즘은 인적성 검사가 IQ 테스트 빨리 풀기 대회니까) , 인건비까지 더 싼 신입사원을 뽑지 않고 굳이 경력직으로 (업무 경력으로 보면 신입과 똑같은) 박사를 채용하는 이유는 그렇게 쓸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뽑혀 와서는, 경력 없는 일반 신입사원과 똑같은 종류의 일들만 열심히 한다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처리를 한다고 한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자격지심 때문에 박사 타이틀을 일부러 없애면서 주어지는 모든 종류의 일을 닥치는 대로 열심히'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내가 좋든 싫든, 나는 회사가 현재 갖고 있는 challenge와 그 이면에 숨겨진 근본적인 기술적 문제를 드러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제대로 인정받는 길이다. 졸업할 때까지 연구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능력을 키우고 발휘해서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스스로 박사의 무게감을 덜어 내려 하지 말고, 그 무게감이 오히려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번주도 노력하자.

Keep learning, keep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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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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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 집 이사를 끝으로 길었던 대전에서의 생활을 정리했다.

태어난 곳 다음으로 긴 시간을 보내며 나의 20대와 대학원 생활, 결혼, 출산, 육아 등 중요한 이벤트가 모두 있었던 대전인데, 떠날 때는 진심으로 미련이 단 한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추억이 많았지만, 그만큼 내 영혼을 가장 많이 찌그러뜨려 놓은 곳이 대전이니까. 

세어 보면 결코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지만, 자괴감가 함께 파묻어버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미숙한 연구 조각이 화석처럼 새겨진 곳.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자니 죽을 것 같았고, 모든 것을 남탓으로 돌리자니 내 부족한 역량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곳. 졸업 후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하나만 가지고 결혼과 육아를 하며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을 쌓았고, 실제로 부모님께 손 벌리고 카드 결제일이 돌아올 때마다 걱정하며 재정적 부채 역시 함께 쌓여갔던 곳. 나에게는 시간과 실력과 돈이 모두 부족했던 삶으로 점철된 곳이 대전이었다. (그래도 아내와 아이는 나의 극단적인 표현이 무색하게 대전을 즐겁게 지냈던 곳으로 생각해 주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십수 년 동안 썩지는 않았지만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져 가던 나에게 일어난 생활환경의 전적인 변화가 너무나 반가웠다. 홀가분하게 대전을 벗어난 후, 오로지 회사에서 일만 하고 남는 시간에는 집에서 쉬기만 하면서 내 머릿속에 들어찬 독기를 빼내듯, 해독의 시간을 보냈다. 아직도 우울증 약은 계속 필요하지만, 대략 10년 만에 잘 먹고 잘 자는 평범한 삶이 내게 주어져서 감사하다.


작년 한해 동안 나는 실패한 박사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불쑥 떠오르는 정도로 줄어들었다. 시간과 실력과 재정의 결핍 중에서 시간이 해결되었고, 재정도 조금씩 해결되기 시작하면서 이제서야 나 자신을 삐뚤어진 시각이 아닌 정상적인 시각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도교수는 졸업할 때 온전하게 증빙하지 못했던 내 '실력'을 만회할 수 있도록 아직도 연구에 코멘트를 해 주시고, 나는 일주일 중 겨우 3시간밖에 쓰지 못하지만 그 얼마 안되는 시간을 써서 논문 진도를 나가고 있다. 사실 평일 퇴근 후 저녁시간과 주말 전체 시간이 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지만, 지금은 그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에 쓰고 있다. 박사과정 내내 방치했던 가족을 향한 일종의 부채 상환이기 때문에 연구 시간으로 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무리하지 않고 주어지는 시간 안에서 실력을 쌓아 가야겠다. Keep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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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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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다음 단계

Life/일상 2019. 11. 2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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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운 곳으로 출근하기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동안 삶의 모양과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이사는 많이 했지만, 도시를 옮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거주하는 도시가 바뀐다.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은 전반적으로 평화롭고 좋은 추억도 많지만,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고생한 기억도 많기 때문에 다 털고 떠나는 상황이 슬프지 않다. 다만 그동안 교제하던 친근한 사람들로부터 물리적으로 더 멀어지는 것은 아쉽다. 

초반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가족이 함께 살 적절한 집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을 잘 차리고 있기를 스스로 다짐한다. 무엇보다 주제넘는 선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적 욕심 때문에 집을 찾아보는 내 시야가 왜곡되지 않아야 할 텐데.

아마 지금껏 실험실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기술과 훨씬 거대한 규모의 전산화된 환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모르는 것을 단기간에 알아내고 써먹어야 할 때, 굶주린 늑대처럼 구글 검색 결과를 헤집고 다니던 때의 내 마음가짐이 앞으로도 통했으면 좋겠다. 물론 대학원 연구실보다는 여러 모로 훨씬 체계적일 테니, 회사의 시스템이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Keep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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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분야에 관계 없지만 굳이 한정짓는다면 전공 분야에서) 더 잘하기를 원했고, 더 잘하게 되는 만큼 내가 자력으로 맡은 일들을 더 잘 (많은 경우에서 더 빠르게) 진전시키는 것을 항상 바라고 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의 역량과 관계 없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 소위 말해서 '하드캐리'로 진전되는 경험들이 하나둘씩 누적되다 보니 (물론 드러나지 않았을 뿐 실패도 같은 비중으로 누적), 바보같지만 더 잘하려고 애쓰는 시간의 일부를 떼어 내서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요행을 바라기 싫어했지만, 정작 그것이 무시무시한 완벽주의로 돌아와서 더더욱 나를 짓눌러서 현재의 나를 지속적으로 망가뜨리는 광경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게 맡겨진 일들은 과거부터 줄곧 그래 왔듯이 지금도 여전히 도전적이다. 내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달려드는 도전적인 상황에서, 내가 내 역량이 더 뛰어나지 못해서 이것들을 멋지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면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후회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것을 잘 하는지, 나의 가치는 어디에서 가장 값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길지 않은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고 싶다.


내게 주어진 일정량의 능력과 나의 특성을 합쳐서 어디에서 어떤 가치를 실현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바보같지만 그저 하늘을 올려다 보며 기도하게 된다. 도전적인 환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완벽주의에 갇힌 바보가 되는 것보다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 가는 행복한 바보가 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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