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 개인연구와 관련해서 일하다 보면, 지금 하고 있는 그 작은 일 말고 그 일을 끝냄으로써 시작하게 될 그 다음 작업들과 또 그 다음으로 이어서 할 작업들... 이렇게 어떤 궁극적인 목표(예: 논문 완성, 샘플 앱 완성)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단계들을 미리 한번씩 다 생각해 보면서 쓰지 않아도 될 정신력을 미리 쓰면서 마음이 빨리 지치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런 염려(?) 때문에 목표가 분명하고 due date가 확실하면서 또 너무 길지 않은(2-3일 정도) 일들은 지금껏 잘 처리해 온 것 같다. 예를 들어, 제안서 작업은 제출날짜가 확실하고, 보통 본격적으로 작성을 시작해서 끝내기까지의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으며, 보통은 다음 회의 전까지 만들어야 할 내용의 범위와 수준이 정해져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용 자체가 어려울지언정 그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밑그림을 대충 그리다 보면 결국 몇 시간 뒤에는 어느 정도 그럴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에 수반되는 내용도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반대로 due date가 탄력적이고, 문제정의도 하기 나름이고, 그로 인한 해결의 범위(solution space)에 제한이 없어지는 종류의 일을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발짝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지쳐 버리는 나를 발견한다. 대표적인 예가 내 개인연구 주제에 대한 논문 작업(!!)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될 중요한 일인데 오히려 제안서를 쓸 때나 연구과제의 실적보고서를 만들 때와 비교하면 정말 형편없는 생산성을 보여줄 때가 너무 많다. (내가 박사과정이 자꾸 길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기에 추가로 하지 않아도 될 자책, 왜 나는 나의 지금과 같은 인생의 단계에서 아직도 이 정도밖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한탄을 하기 시작하면, 안 그래도 부족한 정신력을 더 빨리 소비해 버리고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 날은 잠도 빨리 들지 못하고 일도 못하고 먼저 지쳐버린 마음이 몸까지 지치게 만드는 정말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어 놓고 다음 날을 시작하곤 한다.
이와 관련된 연구도 있듯이, 정말로 내 머릿속의 집중력은 고갈되거나 채워지는 한정된 자원임을 매일 느낀다.
결국 대학원에 있으면서 연구실 전체를 위한 제안서만 잘 써내고 내 개인연구의 생산성은 무식하던 석사2년차 때나 결혼 준비하던 그 바쁘던 때만도 못한 비대칭적인 인력이 되어버린 것도, 결국 내가 나 자신의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잘 아껴서 관리하지 못해서 얻게 된 문제는 아니었을까?
내가 수시로 지금이라도 박사과정을 그냥 중단하고 지금껏 연구실에서 습득해 온 개발 능력을 조금만 더 다듬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어딘가에 취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매일 너무 쉽게 지쳐 버리는 내 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오늘은 집도 학교도 아닌 곳에 나 자신을 격리시켜 놓고 내 상태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사실 개인연구를 하려고 이렇게 스스로를 격리시켰는데, 또 위의 상황처럼 마음이 지치려고 하는 것 같아서 도대체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책상에 앉아 있는 나를 그냥 둔 채, 마치 유체이탈을 하는 것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나 자신을 관찰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는 이 시간이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지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 글쓰기가 끝이 나면 다시 내가 하려던 개인연구의 작은 단계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책도 있다는 것(최고의 휴식, 구가야 아키라 저)도 알게 되었고, 그냥 잠깐의 고민도 없이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아마 읽어 봐야 알겠지만, 쓸데없이 지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정신력과 집중력을 다 소비해 버리는 나 자신을 더 이상은 방치하고 싶지 않다.
항상 남들이 보기에 바쁘기만 하고, 누군가를 특별한 업무적인 목적 없이 만나려고 하면 오히려 업무상의 미팅보다 더 쉽게 만나기 위해 나서지 못하는 내 모습은 분명히 어딘가 잘못되었다. 아직까지는 그 피해를 나 자신만 받고 있지만, 조만간은 이 피해가 내 가족에게 돌아가고, 나와 연결된 작은 사회에 영향을 끼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 자신을 챙기고 변화로 이끌고 싶다.
더 이상은 나 자신을 세상 모든 염려를 다 떠받들고 나 자신을 향해 모든 정신적인 희생을 집중시키는 '아틀라스'와 같은 포지션에 내몰고 싶지 않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앞으로 조금 더 실제적인 노력을 해야겠다. 조금만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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