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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입사하면서, 나는 내 이력에서 박사 타이틀을 떼어 버리고 오로지 열심과 업무수행 능력으로만 인정받고 싶었다. 내 입장에서 박사학위는 분수에 맞지 않지만, 그간 고생한 이력이 불쌍해서 학교가 나에게 "옛다" 하고 마지못해 쥐어 준 것이었다. 그런 부끄러움 때문에 채용 과정이 끝난 뒤에는 소셜 네트워크에서 학력을 다 없애 버렸다. 그러나 부서에 배치받고 나서 일을 하면 할 수록, 주위 동료들과 상사들은 나를 더욱 더 '네트워크 박사'의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름지기 공학박사는 특정 분야의 기술적인 한계가 어디인지 알고, 인간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기술적인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절차와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잘 했던 것은 특정 기술분야의 정점이 어디인지를 비교적 빨리 찾아내는 것이었다. 문제 정의는 지도교수의 가르침에 비해 평균 또는 그 이하여서 지도교수의 도움을 자주 받았던 것 같다.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문제 정의가 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려고 하거나, 정작 문제 정의를 해결하는 가장 핵심적인 action item 말고 곁가지를 먼저 챙기는 실수를 자주 했었다. 뭘 실험으로 증명해야 되는지 스스로 이해하기도 전에 실험 환경을 만드는 성급함이랄까...

그런데 회사에서 연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부서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박사의 문제 정의 능력이 필요한 업무는 여전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상사의 상사의 상사쯤 되는, 경영진까지 보고를 해야 하는 일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문제의 핵심을 제한된 분량의 슬라이드나 문서로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입사 후 초반 몇 개월 동안은 내가 회사가 돌아가는 그 자체를 익히느라 중요한 일을 맡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회사의 현황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 가끔 부서 차원의 결정에 관여하거나 윗선에 보고해야 할 때, 사람들은 나에게 박사로서의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회사가 나보다 더 체력도 좋고 두뇌 회전도 좋으며 (요즘은 인적성 검사가 IQ 테스트 빨리 풀기 대회니까) , 인건비까지 더 싼 신입사원을 뽑지 않고 굳이 경력직으로 (업무 경력으로 보면 신입과 똑같은) 박사를 채용하는 이유는 그렇게 쓸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뽑혀 와서는, 경력 없는 일반 신입사원과 똑같은 종류의 일들만 열심히 한다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처리를 한다고 한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자격지심 때문에 박사 타이틀을 일부러 없애면서 주어지는 모든 종류의 일을 닥치는 대로 열심히'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내가 좋든 싫든, 나는 회사가 현재 갖고 있는 challenge와 그 이면에 숨겨진 근본적인 기술적 문제를 드러내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제대로 인정받는 길이다. 졸업할 때까지 연구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능력을 키우고 발휘해서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마음가짐일 것이다.
스스로 박사의 무게감을 덜어 내려 하지 말고, 그 무게감이 오히려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번주도 노력하자.

Keep learning, keep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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