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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과정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와닿는 속담이 있다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공통적으로는 잠재적으로 가치가 있는 자원을 많이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정리하고 다듬는 등의 행동을 통해서 실제로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의미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논문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논문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 동안 관련 분야에서 읽었던 논문들을 잘 정리하고 문제를 정의해서, 나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한 편의 논문을 만드는 과정이 구슬을 꿰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러 분야(사실 이 "여러 분야"가 문제다)에 대해서 많은 논문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논문을 보면 석사과정 때보다 짧은 시간 안에 논문의 요점과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 논문이 출판이 안 된다면 그동안 논문들을 읽어서 쌓아 놓은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다가 그동안 열심히 읽었던 논문들 중에서도 실제로 내가 졸업하는 데 필요한, 나의 개인연구 주제에 관련된 논문들만 놓고 보면 논문의 개수가 줄어든다. 그 뿐만 아니라, 그동안 개인연구 주제로 만들었던 논문을 조금씩 고쳐서 제출했다가 reject 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급한 불을 끄느라 동향 분석이 자꾸 미뤄지면서 "오래 되어 낡고 빛이 바랜 구슬"이 되어 가고 있다.

사실 내 논문이 reject 되었을 때 철저하게 분석해서 그 때 논문들을 새로 싹 정리하고 최신 논문들을 끊임없이 읽어서 정리해 두는 부지런함이 필요한데, 논문을 읽어 놓고 머릿속에 둔 채 방치했다가 점차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해서 파일 시스템 어딘가에 묻혀 있는 상태인 경우도 많았다.


내가 꼼꼼한 척 하면서도 무언가 하나를 할 때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과거의 습관으로 인해서, 지금처럼 졸업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나의 개인연구 역량을 뿌리째 흔들고 있는 것만 같다. 이대로 계속 가면 안 그래도 기초가 부실한데 결국 논문을 내지 못하고 버리게 될 것이다.


이쯤 되니 오히려 내가 원래 연구하던 무선 모바일 네트워킹/라우팅 말고 지난 4년여 간 연구과제 실무책임을 맡으면서 타의에 의해서 습득한 소셜 컴퓨팅 쪽 지식을 정리해서 연구를 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평소에 과제는 과제대로 수행하고, 나머지 시간을 최대한 잘 써서 내 개인연구를 게을리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는 그동안 항상 과제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개인연구할 시간은 항상 뒤로 밀렸으며, 그마저도 개인적인 일들과 가정 등에 밀려서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것이 지금의 나에게 더 큰 부담이 되어서 돌아왔다.


정말 인생이 쉽지 않다.

나의 부족한 노력과 체력, 그로 인한 연구역량 저하를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겠는가?

정말 박사과정은 처절할 정도로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해야만 하는데,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인 것일까?

어쩌면 나는 박사과정이 내 적성에 안 맞는 것이었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기에는 너무 심하게 늦었다.


어쩌다 보니 인생의 진도를 반대로 해서 결혼에 육아부터 먼저 시작해 버린 지금의 상황에서, 그렇다고 가족의 우선순위를 마냥 최하로 미루지도 못한다.

연구실에서 수행하는 여러 개의 과제를 최대한 덜 하려고 해도 이것조차 내가 그 동안 항상 나를 중심에 두고 모든 일처리를 하는 나쁜 습관 때문에 일에서 쉽게 빠지지도 못하고 있다. 그나마 교수님께서 많이 배려해 주시고 최대한 과제 일에서 빠지도록 해 주시는 것이 심리적인 위안이 될 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일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결국은 내가 내 스스로 manage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내 습관과 과오를 곱씹으며 그때 좀더 잘 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할 만큼의 여유도 없다. 정말 내 모든 주의를 개인연구에 집중시켜서 빨리 논문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시기이다.


아무래도 아래의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 연구실의 연구과제가 정확히 내 개인연구 주제와 일치하는 경우는 국내에서는 거의 없기 때문에,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축복이다) 과제에 너무 목숨을 걸고 여기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다 쏟아서는 안된다. 명심하자. 나 자신의 노력과 나의 시간은 한정된 자원일 뿐더러, 개인연구에만 투자해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자원이다. 중요한 곳에 우선순위를 두고 아껴 써야 한다.
  • 괴로워도 내 개인연구 주제와 관련된 논문을 나만의 익숙한 체계 (언제든지 무의식적으로라도 꺼내서 확인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물리적이든 사이버 공간이든 관계 없이) 안에서 꾸준히 정리해 두어야 한다. 당장 연구과제 연차평가가 내일이라고 하더라도 내 개인연구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묻어 두면 안 된다. 경험상 3일이 넘어가면 잊어버리기 시작하고, 다시 흐름을 복구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며, 그러다가 보면 당장 하고 있는 실험 코딩을 하면서도 그것을 왜 하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마저 놓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 당장 어딘가에 제출하지 않더라도, 내 개인연구 주제 또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항상 논문 형식으로 미리 만들어서 글을 조금씩 채워 놓아야 한다. 그게 단순한 메모 조각이어도 상관 없이, 논문의 틀에 어떻게든 글자들을 밀어넣어 두면 나중에라도 거기서부터 고쳐서 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하나도 쓰여있지 않은 채로 갑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due date가 잡히더라도 시간 안에 끝내지 못한다.


이제부터라도 구슬 서 말을 꿰어서 보배를 만들어야 한다. 구슬이 빛이 바래고 오래 되었으면 미련없이 버리자. 그렇게 해서 꿰어야 할 구슬이 모자라면 빨리 새로 모으자. 한번에 너무 크고 화려한 것을 만들 생각은 버리고, 졸업을 위한 최소한의 가치와 최단기간의 노력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생각을 하고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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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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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두서없이 쓴 일기입니다.


가끔 육아와 가장의 짐을 짊어진 채 여전히 불투명한 박사학위를 앞두고 부족한 시간을 두고 싸우는 내가 처량할 때가 있다.

아무도 내 고민을 자세하게 모르는 것 같다. 실험은 실험대로 잘 안되고, 하루라도 빨리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신경쓸 것은 너무 많고, 연구에 최고의 집중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지만, 온갖 잡다한 일처리들 다 하고 나면 내게 주어지는 '자원'은 이미 체력을 소진한 육체와 늦은 저녁시간밖에 없다. 그 때가 되어서야 겨우겨우 집에서 도망치듯이 나와서 연구실에 와서 실험이든 논문 작성이든 시작할 수 있다. 이미 그런 늦은 시간에 와 봐야 졸리기 시작하고 집중도 잘 안되고, 기껏 주어지는 시간에도 제대로 실험 진행이 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시간은 시간대로 허비하고, 그렇다고 일처리 제대로 되지도 못한 채 그냥 잠을 자려니 그냥 허비해 버린 하루가 너무 아까워서 잠을 자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뭔가 조금이라도 해둬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쓸모없이 새벽을 맞이한다. 말 그대로, 진심으로 내 인생이 속상하다.


집에 PC를 잘 설정해 놓고 듀얼모니터까지 갖췄지만 아무 소용없다.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이상 꾸준히 집중해야 뭐가 됐든 진행이 되는 연구인데 그럴 수가 없는 환경인 건 너무 당연하다. 정말 예쁘고 귀여운 딸이지만, 잠들기 전까지 딸과 놀아주고 밥 먹여주고 씻겨 주고 어지럽혀진 집안 정리를 해야 하는데, 아내가 그 뒤치다꺼리를 대부분 맡아 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옆에서 그 정신없는 집안에서 혼자 연구한다고 PC 앞에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뭘 도와줘도 도와줘야 안심이 되고, 실제로도 딸아이가 나한테 계속 오니까 수시로 봐줘야 한다.

이러니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하지만, 정말로 실험이든 연구든 진행을 시키려면 주말에 모처럼 시간이 주어졌을 때 독하게 마음먹고 집을 박차고 나와야만 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렇게 안할 수가 없다. 가정적인 남자? 당연히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졸업도 못했고 영영 졸업 못할 위기에 놓인 내가 가정적인 남자가 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에게는 엄청난 사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토요일 하루 정도를 정말 독하게 마음 먹고 가정에서 가정적인 남자로 '희생'해야만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말 그대로 그냥 하루가 없어진다. 그 하루 동안에 연 5억짜리 정부 과제의 연차보고서 한 편을 끝낼 수 있고, 관련연구 논문 10편 정도를 발췌 형식으로 읽을 수 있고, 실험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모듈 하나 정도의 기능과 버그는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가장 좋은 컨디션과 집중력을 모두 아기에게 쏟아부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가 되고 싶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졸업요건을 맞출 수 있는 논문을 내야 되는 상황에서 하루를 온전히 소비하는 것은 나한테는 시간낭비이고, 우리 가족 전체의 불확실성과 고생을 향해서 한 발짝씩 더 전진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가정적인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매일매일 이런 갈등이 단 한 번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것부터 생각하자면,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육아를 할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도 아내도 너무 순진했다. 아기는 혼자서 그냥 잘 클 줄 알았지만, 나 또는 아내의 모든 시간을 다 쏟아붓는 것이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게다가 돈도 이렇게나 많이 들 줄도 몰랐다. 매달 적자가 나다가 가끔 들어오는 대학원생 세금 환급이나 장려금 같은 걸로 겨우 카드값을 메꾸고, 그 다음 달 부터 또다시 적자가 시작된다.


이래서 인생에서 타이밍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제때 졸업했어야 하고, 제때 노력했어야 하고, 제때 인생의 각종 선택이 주는 결과와 의미들을 깨달았어야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게 대략 2년씩 늦어졌다. 지금의 졸업에 대한 고민을 2년만 더 일찍 심각하게 시작했더라면 내가 이토록 고민에 휩싸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왜 이리도 느리고 능력이 부족한 것일까? 정말 속상하고 답답하다. 더 똑똑하고 더 이해속도와 코딩 속도도 빠르고 영어도 더 잘 하고 싶다. 남의 논문은 잘 봐주고, 정부과제 정도는 이제 손쉽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 개인연구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정말 동기부여가 약해지고, 하기도 싫어지고, 잘 진행도 안되고, 어렵기까지 하다. 정말 속된 말로 거지같다.


단 하루라도 가족과 함께 놀기만 하느라 연구실에 나가지 못하거나 컴퓨터를 쓰지 못하면 불안해지는 내 감정 상태를 놓고 보면 워커홀릭인데, 정작 또 연구실에 가서 일을 하려고 하면 쉽사리 진행하지 못하는, ADHD 같은 증상을 겪기도 한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제발 이 거지같은 굴레를 벗어나고 싶다.


연구실에서 정부 과제 제안서 작성, 과제 실무책임 역할만 지나치게 강화한 것 같은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내 졸업연구 주제와 관련은 없지만 주제 그 자체로 놓고 보면 트렌디하고 중요한 편에 속하는 과제를 맡아서 운영했었는데, 내 핵심 실력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부수적인 실력들만 키우는 것 같아서 아주 속상하다. 이런 멀티플레이어 따위 되어서 어디다 쓸 지 회의감만 들 뿐. 지금 배운 이 역량이 쓰일 만한 시기도 대략 10~20년 뒤일 것 같은데 내 핵심 역량을 키워야 할 시간에 리더쉽 역량이나 키우고 있으니 이것 또한 거지같다. 내가 학부 때 진작부터 온갖 다양한 활동들 해 보면서, 이런 활동을 하면 어떤 폐단이 있고 저런 활동을 하면 어떤 수고를 해야 된다는 등의 견적을 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나 보다. 역시나 앞서 얘기한 대로 내가 대략 2년씩 남들보다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서 아주 속상하다. 진작에 잘 했으면...


내가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자녀 계획을 전면 취소했을 것이고, 그외 내 인생에 잡다하게 걸쳐져 있던 연구와 관련없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활동들도 다 중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연구 주제에 대해서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던 그 시절에 내가 내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고조시켜서 하루라도 빨리 실제 실력을 키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 인생은 결국 핵심 역량에 대한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축구 공격수는 골을 넣어야 하고, 골키퍼는 공을 막아야 한다. 박사과정은 좋은 저널 논문이나 좋은 학회 논문을 써야 한다. 그 외의 잡다한 활동들로부터 얻는 실력을 논문 말고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결국 논문이 없으면 실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연구실에 온갖 기여를 하고, 과제 관리를 잘 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푼돈밖에 안되는 연구비 외에 내가 얻는 것은 죄다 눈에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고, 인생의 중년과 노년이 되어서야 쓰일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핵심 역량을 입증하지 못한 채 습득하는 그런 곁가지 능력들은 결국 쓰임받을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썩어버릴 것이다. 


공부해야 할 때 제대로 해야 하고,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시기를 놓침으로써 생기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런 심각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좋게 말해서 믿음이고, 나쁘게 말해서 멍청함이다. 더 이상은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다. 제발 프로페셔널 답게 실력을 갖고 싶다. 내 실력으로 내가 박사학위 받을 만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싶다. 최근 들어서야 이러한 열망이 생겼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내 인생은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방해물이 너무 많이 생겼다. (어떻게 자기 딸아이를 보고 방해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가? 나와 똑같은 상황이 되어 보라고 하고 싶다. 겉으로는 아기와 행복하게 즐겁게 놀아 주고 함께 좋은 추억은 의무감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만 지금 내 속은 우리 가족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듯한 걱정에 새카맣게 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 줄까? 내가 아기의 정서발달에 악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의무감에서라도 놀아 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상태다.)


속상하고 답답하다. 이 분노의 마음을 동력으로 삼아서라도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에 실험이 좀더 진행되기를 바라며, 이렇게 답답한 마음을 글을 통해서라도 쏟아내고, 훌훌 털고 연구를 조금이라도 더 가볍게 진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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