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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

딥러닝을 필두로 하는 인공지능이 사람만큼 (아니 어쩌면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특정 인물의 얼굴을 인식한다. 개와 고양이를 겨우 분류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리 오래 전 뉴스가 아닌데, 이제는 실시간 영상에서 미리 알고 있는 물체(자동차, 동식물, 인공 구조물 따위)를 인식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실시간 영상에서 인식하는 정확도가 아주 높지는 않지만, 고화질 비디오에서 화면에 보이는 모든 것을 평균 95%의 정확도로 인식해 내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강화학습은 우리의 일상에 꽤 많이 침투해 있다. 스마트폰만 살펴 봐도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결정과 행동을 학습하고, 다음 번에 스마트폰 화면을 켰을 때에는 적절한 화면 밝기와 진동 모드, 잠금화면 해제 여부 등을 나에게 먼저 추천해 주는 건방진(?) 수준에 이르렀다.

생산적 적대 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GAN)은 특정 화가의 화풍을 따라하면서 새로운 그림을 창조하고, 세상에 없는 음악을 만들어 내기도 하며, 특정 사람의 학습된 얼굴을 바탕으로 가짜 비디오까지 만들어 내는(deepfake) 수준이 되었다. 그로 인해 유명인의 가짜 영상을 만드는 등 벌써부터 폐해가 생겨나고 있다.
글 생성 쪽으로 집중한 GPT-2 [1]는 아무 주제나 영어 문장으로 던져 주면, A4 용지 두어장 분량의 글을 의외로 그럴 듯하게 작성해 낸다. OpenAI에서 800만여 개의 웹사이트를 학습한 결과물인 Lite version (...)만 공개하고, 그보다 더 큰 버전은 딥페이크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폐해가 심할 것이라고 판단해서 비공개로 결정했다고 한다. "오픈"이라는 단어가 이름에 들어가 있는 단체에서 위험성 때문에 일부러 공개를 안 하는 것이 어이가 없지만, lite version이 생성해 내는 샘플만 읽어 봐도 생각보다 전문적인 느낌이 드는 문장과 그럴 듯한 흐름에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물론 문장 간의 연결이 아직까지는 이상하고, 같은 맥락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등 궤변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lite version의 성능이고 정식 버전은 훨씬 더 강력할 것이다. 즉, AI가 그럴 듯한 가짜 글을 써서 사람을 설득시켜서 말도 안되는 결정을 내리게 하는 상황도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된 것이다.


현재는 인공지능 기술이 특정한 분야와 특정한 목적에 맞추어 개발되고 있고, 인공일반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은 아직 없다. 그러나 각 분야에서 인공지능 기술이 보여 주는 놀라운 성능을 볼 때,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AGI가 인류에게 주는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과 같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AGI를 개발하고자 하는 방향 자체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미 시간적으로도 늦은 것 같다. 일각에서는(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등) AGI가 지구상에 엄청난 재앙을 안겨다 줄 것이라고 경고하고, 다른 쪽에서는(레이 커즈와일 등) 아예 우리가 신인류로 업그레이드 되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엄청난 낙관론을 주장다.

AGI가 어느 쪽으로 가던지 결국 그 방향을 최대한 올바른 방향으로 두고서 인류를 보호/보존하기 위한 노력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계속될 것이다 (UN 같은 단체를 통한 개입이 필요할 것이다). 그보다 나는 AGI와 같은 존재가 보편적인 인간의 지성과 물리적 능력을 모두 뛰어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존재가 기계적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할 때, 인류의 진정한 존재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딥러닝, 강화학습, GAN 등의 근간이 되는 인공 신경망은 인간의 뇌 구조의 일부를 모방한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서 인간이 일상 생활 속에서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신경 세포에 기억을 해 두고, 잠을 자면서 뇌의 활동을 통해서 신경 세포 간에 새로운 연결을 만들거나, 기존 연결을 강화시키거나 거꾸로 약화시키는 등의 작업을 거치고, 또다른 일상 생활 속에서 자신의 뇌를 사용하여 직관, 창의성 등을 발휘하며 살아 간다.

아직까지는 한 사람의 뇌를 인공 신경망으로 만들기에는 용량이 지나치게 커서 불가능한 것이 (딥러닝 기준에서 노드 수와 hidden layer 수가 현존하는 슈퍼컴퓨터 용량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다행이지만, 인간의 뇌 속에서 뉴런을 통한 신경 물질의 전달 속도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른 컴퓨터의 신호 전달 속도는 어쨌든 저용량의 AGI라고 하더라도 산업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생산성을 보일 것이다.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 인간 개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좀더 멀리 보자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상실한다면, 그리고 그런 인간이 매우 많다면?

내 생각에는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진부하게 들리겠지사랑일 지도 모르겠다. 서로 상호작용하고, 사랑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 인풋에 대해 특정 아웃풋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내리는 판단이 아닌, 말 그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utility function의 결과값에 전혀 상관 없이 내리는 모든 결정만큼은 인공지능이 학습할 수 없기를 바란다.


[1] https://openai.com/blog/better-language-mod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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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s / 3-way handshaking  (0) 200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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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y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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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영역을 막론하고 특정한 쪽의 극단보다는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균형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신앙의 균형은 특히 요즘의 내 삶 속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처음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주요 성경구절을 통해 구원의 교리를 알게 되었을 때의 희열은 놀라웠다. 말주변 없고 왜소하고 대인기피 증세도 있던 내가 매일 별 의미없이 보내던 10대 시절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흔히 말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라고 하는 시점 이후로 내 삶에 물리적인 변화는 별로 없었지만, 이상하게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 구절과 찬양의 가사부터 생각하고 혼자 즐거워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잘 모르면서 진지하게 생각했는데, 신앙 교리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매우 얕았지만 열정만큼은 넘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마치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기쁨이 생겨나는 듯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쁨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고 아기를 키우며 박사과정 졸업을 준비하는 지금 내 시점에서 10대와 20대 싱글일 때의 패기 있는(?) 신앙의 열정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생각해 보면 '사랑'의 특성일 수도 있다. 처음 사랑할 때의 기쁨은 정말 놀랍고 세상이 달라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누군가와 연애할 때와도 비슷하다. 그 사랑이 최고점에 이르러서 결혼을 하고 결실을 맺어서 가정을 이루고 아기를 키우기 시작하니, 여전히 똑같이 사랑하는 아내이고 사랑하는 자녀이지만 처음과는 다르다. 맨 처음 시작할 때처럼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랑이 샘솟고 그 감정이 지속되면 가장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의지'를 동반한 노력이 필요해지는 것 같다.


하나님(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치여서 유지되지 않을 때, 나는 내가 저절로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처럼 사랑이 샘솟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고, 나는 왜 (잘 믿는다고 생각되는) 남들처럼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오해의 불길은 내 삶의 근본적인 소명, 즉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동기부여를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불길로 크게 번졌고, 지금의 대학원 생활에서 성취해야 하는 것(박사학위)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인 결핍은 10대 때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 때와 종류만 다를 뿐이지 현실적인 결핍은 똑같이 있다. 한창 신앙의 열정이 커져갈 때에도 내 성격과 외모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찔렀었다. 지금은 내 실력부족과 실력부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의지박약까지 싸잡아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못마땅하고 싫은 상태지만, 결국 결핍이 인생 내내 존재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하지만 부족함 속에서도 결혼 생활을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신경쓰는 것을 사실은 신앙에서도 똑같이 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신앙에서만큼은 여전히 '저절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요즘은 그게 안 되는지를 너무 골똘히 생각하느라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의지를 다짐한다. 처음 사랑할 때의 기쁨에 힘입어서 초반에 저절로 삶이 살아지는 것 같겠지만, 알다시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크기의 자극에는 매우 빠르게 적응을 하며,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되지 않게 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바울이 위의 말씀을 비롯한 여러 편지를 통해서 항상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사실상 명령하다시피 가르친 것도, 신앙생활이 마냥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신앙의 기쁨은 내가 의지적으로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이지, 한 번 믿고 나면 저절로 발동되는 패시브 스킬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끝까지 격려해 주시고 도와 주시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시지는 않는 젠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 그에 맞게 호응해서 합을 이루기 위해 나의 의지와 노력, 호응도 필요하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물론 내 의지만으로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도 못하는 내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을 좀더 많이 배려(?)해 주시는 것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신앙의 기쁨이 솟아나고, 그 기쁨을 동력 삼아서 내 삶의 동기 부여도 무한정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쪽으로 균형을 더 맞춰서 전인적인 신앙생활을 통한 삶의 긍정적인 발전을 이끌어 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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